2013년 9월 11일 수요일

09년 9월 21일


090921

  뜨거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해도 나는 울지 못한다.  어제의 눈물이 오늘 흐르는 것이 나는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다. 물이 휴지에 스며들듯 나의 엎질러진 감정 또한 눈시울로 스며든다. 
  삶의 노고가 그들의 삶을 진창에 빠뜨리고, 진흙바닥에 얼굴을 부비게 만든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그들의 사과를 빼앗가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에게서 얼어붙은 심장을 도려낸 사람은 또 누구인가. 될 수 있는한 많이 지껄이는 은유가 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왜인거냐.
  내가 구하는 답을 그들에게 물어보는 나의 이기심은 알고도 지나치는 부끄러운 바리새인의 걸음이었다. 착한 사마리아의 법이 나의 이기심을 심판하기 전까지 나는 범죄자였다.
  오른팔이 아프다. 쿡쿡 쑤시는 근육이 나의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나의 뛰는 심장을 나의 개가 느끼고, 그 개의 심장 소리를 내가 느끼고, 서로가 서로의 심장 소리와 탄력적인 피부의 촉감을 어루만지고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갈증은 생명의 원동력이다. 피곤과 잠은 내 육체를 탈피하게 해주고, 정신의 바다를 유유히 헤엄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화장실에 앉아서 내가 아픈 곳이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 순간, 전에 느꼈던 그 안도감을 다시 한번 느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건강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뿐이다. 그게 사실이다라는 것을...
  건강함, 삶에서의 균형이 오래 지속되는 순간 나는 지금의 나를 잊고 축복인지 저주인지, 미래에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추락한다. 나에게 깊은 집중은 축복이라지만 그 깊이를 가늠한다면 저주이리라.
  어둠이 짙게 깔리고 이 시대의 상징인 번쩍이는 간판만이 허공에 떠 있는 이 시점이 되면, 스치우는 가을냄새만큼 내 귀는 음악을 갈구하고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 것은 에너지다. 일어나서 잠드는 그 시간까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잠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앉아있지도, 서있지도, 누워있지도 못한다. 죄를 지어 양심으로부터 벌을 받는 심정으로 삶에 임한다. 조용한 이 때에 생각해보면 나의 삶은 참으로 치열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눈에 멋적고 생산적이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그럴 뿐이다. 내 성격이 그렇고 성향이 그렇다. 그리고 생각이 그렇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런 삶의 방식이, 사고 방식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한 부분을 대변해주는 명찰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모두들 가슴팍에 매달고 있는 그런 명찰 같은 거다.
  눈을 감고 암흑 속에서 떠다니는 사념 하나를 붙잡는다. 그것은 마치 밤 호수가에 날아다니는 반딧불 같기도 하고, 잘 보이지 않는 날파리 같기도 하다. 그것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듯 그 반딧불이 날아가 버렸다.
  

  나의 삶은 집중과 열정이다. 빠져듬이 없는 삶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고 지루할 뿐이다. 무언가에 빠졌다면 그 곳에 몸을 던지고, 질린다면 다른 것을 찾아야 나는 살 수 있다. 질렸는데도 그 곳에서 젖은 몸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면 나는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어느 부분이 되어도 상관없다. 나의 집중과 열정을 떠받들어 준다면 어느 정도의 텁텁함은 감수해야 한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내가 그것을 잡아먹고, 또 어떤 새로움을 찾아 짐을 꾸린다. 핏기 스치운 얼굴을 들고 나는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세상이라는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줍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늘의 색과 구름들의 모양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하늘을 만지고, 구름들을 주머니에 담는다. 물론 그것이 나를 만족하게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질리지 않는 삶을 산다.
  빌어먹을 재미를 또 찾아보자.

09년 언젠가


  히히덕거리고 시덥지 않은 모임 따위는 나랑은 안맞는다.  웃기지도 않고, 아무런 생산성도 없고, 찌질한 모임따위는 정말 나랑 맞지 않는다. 기가 막힌 팀웍도 없고, 원대한 목표도 없고, 너무 쉬운 목표가 널부러져 있고 비아냥 거리기만 하는 그런 곳에 나는 왜 있었나. 쾨쾨한 냄새처럼 후줄근한 만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소중한 나의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 박아버린 기분이다. 시간은 이리도 흘러버려 벌써 10시 37분. 내 시간은 그 퀘퀘함 속에 흘렀었다. 이렇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을 하고, 공상을 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 그 시간에 실천이 결여된 상상이나 하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열번을 해서 한번의 아랫배 저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생각은 항상 나를 스쳐간다. 그 것은 때로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될때도 있고, 할일이나 소소한 일상의 파편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인생을 바꿔 놓을 생각의 씨앗이 내 가슴속에 뿌려질수도 있고, 내 생각과 관념을 강화시키는 짧지만 긴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때론 생각과 아이디어, 관념들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감을 느낀다. 그 것들을 잡을 수 있지만 잡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트와 핸드폰을 붙잡고 한시도 놓고 싶지 않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나를 스치는 것들을 붙잡고 마음의 씨앗을 뿌리고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눈시울이 붉어져야 하고 저린 아랫배를 붙잡아야 한다. 붙잡은 것들을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해서는 결코 안된다. 바보들의 언덕을 지나고 그 바위에 깔려 죽고 죽어,, 천재들의 시체들과 나는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들의 지혜를 빌리고, 손을 잡고 나에게 축복을 내려주길,,


  

10년 2월 10일


100210

  가슴 속에서부터 슬픔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답답함의 말로인지도 미천한 내가 가진 협소한 능력 탓일지도 모른다. 끈적한 타액이 나를 몸서리치게 핥아대는데 벗어나려는 곳엔 자처한 질리는 미소가 한가득 있다. 선 자리에서 내 발끝을 바라보며 독보적 존재가 되고자 속삭인다.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완전한 한 개인으로 이 삶을 내 안으로 통과시키고 싶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열망을 나는 소망하는가? 진정 독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입을 닫고 스스로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면, 혹은 아예 미쳐버려야만 그 열망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 길이 옳다가도 저기 보이는 저 길이 옳은 어깨 쳐진 갈대는 자신의 열망조차 쉬이 인정하지 못한다.
  강인한 정신을 원한다면 이 절벽 아래 서서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이에 온 몸이 짓이겨져야 한다. 나만의 온전한 고통과 비명이 계곡을 가득 채우고 너덜너덜한 나만이 남아 바위들의 온 무게와 계곡의 무게와 산의 무게를 내가 버틴다면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나의 눈은 더 맑고 투명해지고 산의 무게만큼 내 몸은 더 가벼워질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흘러 나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돌들을 젖히고 툭툭 털고 일어나며 비명이 아닌 내 영혼을 대신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차가워진 눈은 독보적 존재임을 비춰낼 것이고 두 팔 벌려 갈대 밭을 산책한다. 내가 가진 것 만큼을 원하고, 내가 가질 것 만큼을 요구할 것이다. 나를 마주보고 절벽에 설 것인가, 나의 등 뒤에서 절벽을 바라볼 것인가. 스산한 두려움은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고 타다 남은 한 줌의 재가 될 수도 있다. 시체들과 대화가 끔찍하다고 여기면 저 갈대들과 춤을 추라. 내 등을 바라보고 절벽을 응시하라.
  시간의 바람에 모래 언덕처럼 스르륵 사라지는게 두려워하는 시체의 산이다. 모래를 두려워하는가? 그래봤자 우리도 스르륵 사라져간다.

와쌉요!


오랫만에 네 글을 읽는다는 건 
나에겐 아주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는듯하네
요즘 난 뭘하던 그런생각을해
이게 다 무슨소용이야!

가끔이었던 
감당하기 힘든 
무의미한 순간들이 점점 잦아짐을 느껴


널 만나 보냈던 시간들은 꿈을 꾼듯하다
차라리 몰랐다면 바보지만 행복했을까하는
끔찍한 생각도들었어

만족감이 부족해
너와 내가 채운 공간과 올라온 계단을
나 혼자 채워나가고 올라가는데
아직 내가 모자라고 더디다
너도 알거야 
알기에 내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하겠지

아무도 만나지않고 
하지도않고
그냥 누워서 
생각만하며
나만 느끼고싶어
그래서 잠이 많아졌나바
특별한 문제는 없지
그게 문제야

정신없이 챗바퀴뛰다 
빠져나온듯하네
난 다람쥐가 아닌데.

그래도 니 말처럼 뭔가 있으니
살아가는 거겠지?
ㅋㅋㅋ
아 빗소리 좋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친구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른듯 해. 수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었고, 일어나는 중이고, 일어날꺼야. 그 태풍의 중심에 내가 있지. 카멜레온처럼 살자는 나의 다짐처럼 나는 오늘도 수 많은 나와 마주해. 가끔은 내가 다중인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휩쓸려가는 이 현실의 파도 위에서 어찌보면 실타래 처럼 얇디 얇은 지나가는 지금이라는 순간. 이 순간들이 지나쳐서 과거가 되고 지나칠 것들이 미래가 될테지.
  지나친 것과 지나칠 것들의 찰나 속에 지금이 있는데, 그래서 순간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지만 실상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없지. 과거가 있어서 지금이 있는 것이고, 지금에 미래는 영향을 받으니까. 나 자신과의 대화만 계속하다 행여 내가 미치지는 않았나 노파심에 너에게 메일을 써. 그 전부터 쓰고자하는 열망이 더해졌지만, 오늘이 그 축제의 날이네.
 


  '기억해야 함을 기억해라.' 이 말만을 기억하고 오늘까지 살았어. 흐린날도 맑은 날도 있지. 근데 항상 나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만 하다. 하루에도 수십번 무지개가 떠. 너는 알겠지 나의 마음속 심상들을. 

  긍정의 글이든, 혹은 부정의 글이든 내가 쓴 글이 너에게 힘이 됨을 느껴. 이건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이지. 결론과 어떤 목적 없이 보는 드라마 같달까? 마지막회를 기대하지 않고, 끝나지 않기를 손 모아 소망하는 그런거? 아니래도 상관없어 내가 그렇거든.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단. 이 생각은 내 스스로가 하는게 아니라, 어디선가 바람처럼 돌풍처럼 나에게 다가와. 그래서 생각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라 여겨지지만,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야. 생각이 날 찾아오는 거지. 뭘까? 니가 날 부르는걸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죽을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들이 몇가지 있지. 아니 셀수 없겠지?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것들까지 포함하니까.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나이 사십이 금방 될테고, 불편한 노인이 될꺼야. 그 생각에 나는 잠에 못들때도 있어.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평생을 살 것처럼 사는 내 친구들과 지인들, 그냥 사람들. 그런 미친 사람들 태반이야. 내 눈에는 저기 운석이 지구로 날아오는게 보이는데 그래서 우리가 다 죽을거란 확신이 드는데도, 아무일도 없어. 그게 날 미치게 만들어. 그러다가도 또 괜찮아지지. 일이란게 있으니까.

  그렇게 죽음을 내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 긴장도 되고 좋아. 그치만 슬픔을 떨쳐놓긴 어렵지. 왜냐고, 할게 너무 많잖아.

  오늘도 빗장을 걸어잠그고 내 안에 스며들어. 내가 만든 스스로의 감옥에 날 밀어넣어. 그렇게 고독하고 외롭고 춥고 그래. 근데도 그 안에서 계단을 오르는 나를 발견하면 또 저 밖으로 나가기는 싫어. 언젠가는 그 때가 오겠지. 이정도면 충분하다라고. 그러면 뭐 잠깐 나갔다 오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사색을 곱씹어도, 결론은 단 하나. 결국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이냐???

  그치만, 뭔가 있을꺼야. 그렇지?


  난 너의 친구야. 너와 나의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린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죽음이 오는 그 시대도 같을꺼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항상 생각해. 뭐가 되었든 나는 도움을 주고 싶다.라고.

  엄청난 걸 가진거 아냐?

2013년 9월 9일 월요일

블로그의 내 글을 읽으면서,,

 쓰기만하고 읽지는 않던 내 블로그.
  왠지 최근부터 아래로 차차 읽어보고 싶어서 읽다보니 눈물이 나려한다. 내가 쓴 글이지만 내가 쓰지 않은 것 같은 어색한 이 글들이 주는 느낌은 뭘까? 하지만 읽으면서도, 이런것도 추가되어야 하고 이런 내용도 언급해야 하는데 하면 뒤이어 여지없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시성. 분명 내가 쓴 글이 맞긴 하는 것 같아.
  내가 하고싶은 말들이 지금의 내가 읽어보니 도리어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이다.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나의 글들. 이 글들 자체에 문체에 마지막 마침표 하나까지 나에게 힘을 준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읽는 와중 이 글에 대해 평가하고 첨언하면서 조언한다. 그리고 뒤이어 부족함을 채워줄 그 문장이 나온다. 내가 이야기 하고 내가 듣는다. 극단적인 나와 나의 대화다.

  도서관에서 살고 싶다는 글을 읽으며, 미치도록 열망한다. 왜일까? 눈물이 흐를정도로 열망하는 이유는 뭘까?

보통 인간의 1,000년


  완벽한 깨닳음이란 없지만 어쩌면 많은 경험이란 것이 인생에 큰 의미를 차지하는듯 하다. 박진영의 노래 처럼 지금 그는 그 젊은 나이에 혹은 그 늦은 나이에 돈, 명예, 사랑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그걸 깨닳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 깨닳음을 일찍 겪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죽기 전에 겪을테지. 
똑같은 백년을 살아도 누군가는 보통사람의 천년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누군가는 뛰어난 이의 10년의 인생을 살겠지. 결국은 유한한 존재의 인간에서 얼마만큼 농축된 삶을 사는가가 중요한듯하다. 

  완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신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는 것. 그래서 내가 내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주변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의미있는 삶 아닐까?

  그래서 나는 보다 농축된 삶을 살고 싶다. 농축된 삶을 살다가 수 많은 경험이 주는 스스로가 만든 원칙에 갖히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여, 유희적인 삶을 살고 싶다. 어린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가지고, 찻잔의 그 모서리처럼 유머를 가지고 노는 어린 어른으로 살아다가 죽고 싶다.


  내 안에 이 천년이 있다.

2013년 9월 4일 수요일

혼자만의 시간, 혼자인 시간, 혼자있으려는 시간.

  혼자 있는 이 시간에 나는 과일을 먹었다. 냉장고에 늙을만큼 늙은 천도 복숭아를 꺼내서 칼로 잘라 먹는데, 그 신 천도복숭아가 너무나 달았다. 천도복숭아가 이렇게 맛있는거구나 하며 감탄을 해가며 먹었다. 그 순간 또 나는 혼자임을 실감하고 그 상황이 너무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고, 과일을 먹는데 유독 과일을 먹을때 혼자임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치만 슬프거나 외롭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그런 생각을 한다는 내 자신이 웃겼다.

  근래에 나는 여러개의 계단을 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혼자있으려는 이 시간에 책을 보고 사색에 잠기고 생각 의자에 그냥 앉아 있다. 이 작은 컨테이너의 효율적 배치를 위해 이렇게저렇게 바꿔보는 시간을 가지고, 점점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구조에 다다라감을 느낀다. 있는 것 그대로 활용해서 공간활용을 최대한 하고, 이 좁은 공간에 나름의 구역이 짜여져 있다는게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들 그냥 본다면 책상과 책이 눈에 보이겠지만 이 모든 배치의 동선이 나름의 의미가 있단것은 모를 것이다.
  생각 의자에서는 책을 보고, 업무 의자에서는 회사 업무를 본다. 앞의 쇼파와 의자 탁자는 손님용. 그래서 나는 거의 그 쇼파와 의자에 앉지를 않는다. 주로 나는 이 생각용 의자에 앉아 있다.

  생각 의자 옆에 기다란 스탠드를 옮기고 바짝 붙여 수납탁장을 놨다. 책을 읽다가 메모를 하고 싶을때, 혹은 노트북을 올려놓고 싶을 때 혹은 당장 읽을 책들을 올려놓는 용도다. 원래는 뭘 놓을 자리가 없으니 책들을 간이 책상처럼 쌓아놓으려 했지만 우수수 무너질 염려에 고민하던차, 이사할때 창고로 처박히려던걸 가지고 와서 활용한다. 

  이렇듯 내 삶은 개선이다. 점차점차 나은 환경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궁극적으로는 내 영혼을 가꾸고 아름답게 만드려는 의지의 포석이다.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작은 것 안에 더 작은 것들이 무수히 많이 들어있는 것처럼. 나의 이러한 작은 면들을 보면, 나의 큰 것에 대한 어떤 추구를 넌지시 알수 있을 것이다. 

  점차 나아지는 환경과 효율성에 대한 추구, 나의 성장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리라. 거울을 보고 나의 변화를 알아볼 수 없듯, 지금 당장에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주 예민하게 본다면 '느낄'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이 작은 공간에서 계단을 오름을 느끼듯, 아주 예민하게 관찰한다면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은 또 다시 나에게 피드백을 주고, 그 자체가 다시 나에게 힘을 준다. 이렇듯 선순환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쓰기 전의 나와, 쓰고 있는 나와, 쓴 후의 나, 그리고 나중에 그 글을 본 내가 있다. 전과 아주 나중의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걸까?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것은 음식에서의 재료라고 말할 수 있고, 소스이다. 물리학에서의 전자와 입자, 양자 처럼 어떤 파동이고 에너지이다. 이런 것들이 글을 씀으로 인해 구체화되고 어떤 물질처럼의 모습을 띄게 된다. 그 전까지는 그냥 '무' 자체다. 따라서, 아는 것이 없고, 재료가 없다면 이 '무언가'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대상체도 없다. 문장도 없고, 문단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은 고뇌가 됐듯 기쁨이 되었든 그 '무언가'가 지금 분명코 존재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기 전의 나는 이 무언가를 갖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리고 행위를 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책을 읽고 일을 한다. 그리고 생각들을 하고 사색에 잠긴다. 그 후에 나에겐 쓸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혹은 신에게 부여받은 자격이란 것이 생긴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준비된 글을 쓰게 될수 있게 된다.
  한참 글을 쓰면, 머릿속 정제되지 않은 어떤 뿌연것들이 하나의 모양이 되고, 하나의 단어와 문장들이 되고 문단이 되며 책이 되어감을 느낀다. 그렇게 마음껏 토해내고 나면, 비로소 쓴 내가 있게 된다. 
  쓴 나는 그 글을 다시 보지 않아도, 이미 쓰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아주 예리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채지 못하리라. 그렇게 나는 점차 예술가가 되어 간다. 누군가의 말처럼, 하루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다는 것처럼 그렇게 점차 다른 사람이 되어가면 사람들도 알게 된다. 나의 눈빛과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강가의 퇴적물처럼 내 스스로가 퇴적되어가고, 태풍과 큰 비로 인해 침식되어져 간다. 또 퇴적되고 어떤 한 강물의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내면의 나란 존재는 그런 것이다. 글이란 것은 그런 의미를 준다. 과거의 나의 글들이 지금의 내가 보면 참 가당키나 할까싶지만은 그때의 나는 그대로 의미가 있었고, 지금의 나 역시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쓰기전, 쓰는 중, 쓰고난 후, 한참 지난 후의 내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또다른 내가 되어가고 성장과 진화를 거듭해 어느 순간 또 다른 폭풍을 만나 굳건히 벼랑 끝에 해안의 눈을 가지고 서 있을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다. 변화의 순간순간에 지금의 나 역시 있을수 밖에 없기에 모자라고 조바심나는 내가 여기 서있지만, 나는 안다. 이 모든 것들이 저 높은 곳에서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항상 태풍의 눈에 있거든.

매출 분석을 하다가....




       보이는가 이 숫자들의 향연이.

숫자들,, 내가 쌓아놓은 이 데이터베이스가 더더 차곡차곡 쌓여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될테야.
이 춤추는 숫자들이 얼마나 재미있어. 더하고 더해야지. 다듬고 다듬어야지.

저 숫자들이 엄청난 콤마들을 달게 될꺼야. 
그 숫자들이 힘을 갖게 되겠지. 나에게나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될테야.
그러다가 정체되고, 다시 우린 호흡을 가다듬고, 보이지 않는 것에 우리를 걸테지.

분류별 매출에서 바닥을 찍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그 곳이 정말 노다지 임을 의미하는 거지. 다른 것들을 유지 한채로 그 바닥을 끌어 올리면 돼. 그럼 더 재밌어질꺼야.
그러다가 그 분류들이 의미를 상실하는 날, 우리는 알을 깨고 밖으로 뛰쳐 나가서 세상으로 나들이 가야지. 니나노. ㅎㅎㅎ

2013년 8월 17일 토요일

By myself.

주변 사람들,
내 꿈, 
비용,
돈,
익숙함,
고정관념,
습관,
장소,
지식,





나 자신


  그래서, 항상 꿈을 꾸고 자신을 재정비해야 한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결국엔 돈이 다가 아님을 잊지 않기 위해, 익숙해지지 않고, 정착하거나 안정적이지 않기 위해, 고정관념이 되지 않기 위해,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내가 있는 곳이지만, 이 곳이 언제든지 바뀔수 있음을 인지하기 위해, 내 지식이 전부가 아니고 진리가 아님을 항상 깨닫기 위해서……
  결국엔 내 자신이 내 정신을 흐뜨리는 주범인 셈이지. 그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스스로이기 때문에.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하루 8시간 책을 읽고, 4시간 글을 쓴다.

  "집에 못간다면?"

  이 말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가진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내가 하는 일들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모든 것. 진정 내가 가진 것 하나만을 가지고 나머지를 다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가 가진 이 몸뚱이와 정신만을 가지고 나머지와 분리된다. 조금만 신이 나를 배려한다면 나의 마지막 의지처럼 가진 노트북 하나는 남겨주겠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서관 옆에서 살아야지. 그리고 하루 종일 공짜 책만 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견하고도, 당연스러운 이 순간적인 생각이 내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돈이 없으니까 나는 도서관 옆에서 살고, 도서관에서 살것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보고, 약간의 시간 동안 글을 쓰겠지. 그치만 뭘 위해서? 결국 다시 이 자리로 올 것이다. 사업을 하는 것. 즉, 나의 사람들과 하나의 비전과 꿈을 위해서, 살겠지. 세상 눈으로 본다면 돈을 버는것??
  5년 정도의 시간을 책 속에 파뭍혀서 식견을 넓히고, 나를 크게 키우고, 꿈을 더 키워서 그 움츠렸던 5년의 시간을, 5년 동안 일만 한 사람보다 더 빨리 보상받겠지. 그리고 다시 이 자리에…

  도서관의 책을 전부다 읽고, 나의 너덜해질 노트들과 꽉꽉 채워질 에버노트. 중요한 것은 이거야.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 남을 어떤 것. 그 어떤 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

생각의 흐름

앉아서 적적하니 음악이나 귀에 꼽고, 생각을 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흐지부지 에버노트에 적어보아.
상념들과 아이디어, 생각들과 미래에 관한 것들을 떠오르는데로 끄적여봐. 그러면 좋은 것들이 남을 것들이 그물에 걸러지듯, 부피가 큰 것들이 체에 걸러지듯, 그렇게 내 안에 남을꺼야.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들은 떠오르겠지. 

신경쓰게 하는 것들은 중요한 것들이 아니니 가볍게 떠오르게 내버려두고, 무거운 것들 이 중요한 것을을 주목하자. 가라앉은 돌들을 주워담아 요리조리 관찰해 봐. 분명 다른 어떤 것이 있을꺼야.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가장 기본 단위는 나.

  내가 우선 단단하고 스스로를 붙들어야 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듯, 스스로가 좋은 컨디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면의 흔들림을 가지고 주변을 아우를 수는 없는 법,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터, 내 스스로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을 사랑할 수 없고, 나를 믿지 못하면서 남을 믿지 못한다. 나의 꿈이 없으면 나를 위해 살아달란 건 그저 연민이다. 내가 세운 목적지 없이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 역시 모순이며, 내가 짐을 지어보지도 않은채 나의 짐을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
  나의 책임과 권한을 나누어줄 때는 그 둘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거기에 동기와 이익 역시 균등하게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내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냥 이 우주와 세계가 돌아가는 어떤 가장 기본적인 부속 같은 느낌이다. 그 부속이 뭐라 말하기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없으면 안되는 것을 증명할수는 있는 느낌이랄까?
  기본에 충실해야 하며, 상식을 눈 여겨 봐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정확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 것 없는 것은 요행이라 치부해도 무방하다.
  다만 나는 기회나 시대, 새로운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모두가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나의 사람들에게 들이 밀어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나에겐 많이 부족하니까.

2013년 8월 10일 토요일

혼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난 더 강해지지.

혼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난 더 강해지지.


이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나는 지금 머리속으로 도시를 지었다가 없애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죽은자들과의 대화는 실로 경이롭고,
내 호흡은 상대적으로 무척 생기있다.


공간은 생각을 만들기도 해.

공간은 생각을 만들기도 해.
생각이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

건강은 생각을 만들기도 해.
생각이 건강을 만들기도 하지.




문제는 어떤 생각으로 내 머릿속에 자리를 내어주느냐야.

정신력!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
상상력 없는 정신력은 그냥 참는것 뿐.
기생충처럼 결국엔 스스로를 잡아먹고,
같이 죽을테지.



포르쉐. 목적지


상상의 근본

~했으면 좋겠다.
     (막연한 바램) - "무얼 원하는지는 알아야지!!!"



~이루어짐을 상상
     (목적지) - "제일 중요"



~노력, 실행, 몰입
     (과정) -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재미있는 일일 뿐이야. 마치 돈처럼"

상상

  끊임없이 상상해야 해. 상상의 중요한 파트는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지독하게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곳으로 내 삶이 수렴해 갈 수 있는 모두의 노력을 얻게 된다. 만약, 상상이 현실적이라면 그 현실적인 것에 모두의 노력이 수렴해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갑자기 들어닥치는 예상치 못했던 것들에 짓눌리고 말 것이다. 이상하게도, 현실을 현실적으로 상상했는데 왜 예상치 못한 것들이 들어닥친단 말인가?
  바라는 목적지는 항상 장미빛 세계여야만 해. 그래야 그 조명된 곳으로 우리를 끌고갈 힘을 다시 우리 스스로에게 줄 수 있으니까.

확고함

확실함. 스스로의 믿음. 그 것이 없으면 내 주변은 요동친다. 계획과 행위는 바뀔 여지가 있지만, 일단의 확고함이 내 스스로가 없다면 계획하고 실행하기도 전에 계획만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유

내 삶에 스며든 보스 스피커

이젠 좋은게 좋은지도 몰라

그저 나쁘지 않은게 되어버렸네

멋져.

토해내

과거의 언젠가의 내가 그랬듯 지금 역시 익숙한 넬의 노래를 들으며 늘상 썼던 노트와 펜으로 글을 남겨. 인터넷과 에버노트, 수첩, 노트 등에 편파적으로 남겼던 나의 글들이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오히려 글을 쓰질 않네. 어떨때는 이게 옳다가도 어떨때는 저게 옳다. 책을 읽는 방법도 마찬가지야. 거의 쓸 때의 나만 있는걸?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마. 그냥 토해내. 그럼 나는다른 내가 되어 있을테니까.

2013년 8월 4일 일요일

Sony Vaio pro 13


소니 바이오 프로 13 




딱 지금의 시기에 살만한 노트북이 없다. 3세대 인텔 cpu는 4세대가 발표되고 나서 성능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혹은 4세대가 단순히 배터리 사용량에 대한 이득만 있다 하더라도 3세대 cpu가 탑재된 노트북은 구매가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한성컴퓨터나 델의 얼라이언스 같은 포지션이 애매한 노트북을 사용할 수는 없어서 소니의 최신 바이오를 사게 되었다. 사실상 글로벌 기업의 랩탑은 소니 바이오 말고는 4세대 cpu 를 탑재한 제품은 전무하다. 물론 운영체제가 OSX 인 맥이 있긴 하지만, 이미 레티나를 사용하고 있고 윈도우 전용을 대체할 제품을 찾기 때문에 적어도 내게는 구매 대상에 오른 유일한 랩탑이다.

  지금껏 3년 정도 레노버 T430 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전 윈도우 노트북도 x200 을 사용했었다. 2~3달 정도 바이오 13인치 S 시리즈를 사용했지만 내 사용패턴이랑은 맞지 않아서 x200 을 맥 사용전까지 기변해서 쭉 사용했었다.

  다음 노트북 역시 x1 카본 같은 씽크패드 제품으로 교체하려 했지만, 레노버는 새로운 cpu 를 탑재한 랩탑을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x230s 같은 모델이 출시되었다고 하지만, 예상 해상도가 1300대인가 했던걸로 기억한다. 

  내가 필요한 랩탑의 요구 조건은 다음이다.
1. 사용시간 12시간
2. 사무작업에 무척 쾌적할 정도의 성능
3. 타이핑이 즐거울 수 있는 키감
4. 높은 해상도(1920 정도)
5. 13인치
     꾸준한 사후관리(자체 드라이버 업데이트)
     별도의 관리가 필요없어야 함(충돌/업데이트 등)

  그나마 씽크패드가 나의 요구에 가장 근접한 제품이었다. 비교적 오래 가는 배터리 사용시간과 사무작업에 특화된 디스플레이와 키보드 레이아웃, 포맷한번 하고 시스템 업데이트 실행해주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비교적 알아서 드라이버 따위를 잡아 준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드라이버 충돌이 있고, 레노버의 씽크밴티지가 사용이 안되는 경우도 있으며, 절전모드 해제 오류등으로 재부팅을 해야 한다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이런 점들은 다른 회사들의 랩탑에 비해 편하고 신경쓸 거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스웰 레노버는 나오지 않고, 9월 쯤이나 되어야 차차 출시될 것이기에, 어차피 1~2년 쓰고 기기 변경을 한다 생각하고 다시 소니 제품을 손에 쥐어 보니. 으음.. 
나랑 맞지 않는다.

  광고나 인터넷 검색으로 보면, 사실 디자인이 상당히 잘 빠졌다. 투박한 씽크패드와 미적으로나 절제적으로나 단순하고 심플하면서 프리미엄 제품의 느낌이 구석구석에 있다. 슬림한 카본 소재로 내구성과 무게를 잡았으며, 4세대 하스웰로 8.5 시간 사용가능이란다. 1920 풀HD 해상도 디스플레이와 터치 가능도 뛰어나다 평가한다. 상대적으로 usb 포트 2개, hdmi 포트 1개, sd 1개. 이 구성이 포트 구성의 전부이지만 뭐 이동성을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이마트에서 구매, 비싸더라도 블랙을 구매하려 하였으나, 하이마트는 물량이 안들어오고, 광주에 소니 센터에는 그 마저도 물량이 없다 하여 색깔 따위 뭐가 중요하냐며 차 살 때의 나처럼 바로 손에 쥘수 있는 걸로 결정했다.
  디피된 상품의 키보드를 눌러보고, 뭐 이정도는 준수하네라는 생각으로 구매 후 사무실로 돌아와 세팅을 끝내고 usb 프로그램을 깔라는 순간 인식이 안된다. 뻒뻑한 usb 포트, 다음 포트에 연결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 였다. 육안으로 확인해보니 안에 usb 핀이 말려들어가 있었다. 초기 불량인가. 사용자 과실인가. 내구성을 이따위로 만들었으니 초기불량이겠지 하면서도, 보는 각도에 따라 내 잘못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날 신제품으로 교환했다. 상당히 귀찮았다. 

  윈도우8의 터치. 신기하긴 했으나 손을 화면까지 가는게 여간 힘들고 피로도 누적되고 귀찮아 잘 쓰지 않게된다. 터치 기반의 앱은 일반 프로그램과 같다 하더라도 서로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메일 설정을 해 놓은 아웃룩과 앱 기반의 메일 프로그램에서는 호환되지 않는다. 즉, 모든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에버노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정의 귀찮음.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속내가 그대로 보였다.

  한 3일 동안을 맥을 대체할 수 있게끔, 적어도 맥의 사용량을 줄일 수 있게끔 신경쓰고 프로그램을 깔고, 설정을 해보았으나, 지금의 결론은 불가능하다였다. 맥의 iphoto 나,  iMail, iTunse, iCal, 등등,,,,,,,, 대체의 불가능이다. 내가 만약 윈도우 PC 한대만 있다면, 예전 구글 설정으로 사용했던 때처럼 해보겠지만, 그 설정과 관리의 시간들이 내겐 너무나 큰 비용으로 여겨진다. 시간은 돈이기 때문에 차라리 맥과 pc 두대를 쓰는게 낫다는 생각이다.

  맥에서 쓰기 힘든 엑셀과 쓰기 불가능인 회사 프로그램, 인터넷 뱅킹. 이 세가지만 윈도우에서 하자고 마음 먹는다. 더 욕심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이 뻔하기에, 그 외의 것들은 기존대로 맥에서 한다. 

젠장
윈도우는 맥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ㅁㄴㅇㄹㅁㄴㅇㄹㅁㄴㅇㄹㄴㅇ러몬ㅇㅎ;ㅣㅓ키ㅏㅓㅁㄴ'ㅓㅣㅎㅁ
ㄴㅎ마ㅣ'ㄴ엏민'ㅏㅇ허
ㅁㄴㅇㅎ
ㅁㄴㅇ허



안녕? 내 블로그. 오랜만이야.

타이핑에 걸리적거려서는 맥북레티나 알루미늄을 긁어대지만, 난 게의치 않아.ㅋㅋㅋㅋ
오랜만이야 나의 블로그야. 

2013년 5월 31일 금요일

삶의 수렴


  인간은 우주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이지만, 사고 안으로 우주를 포괄할 수 있다. 생각의 힘은 대단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앉은 자리에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우주의 별들을 그 생각 안에 품는다. 마찬가지로 생각은 과거를 회상사고,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현재를 살지 않는다. 거의가 그렇다. 과거 내가 그린 그림처럼 방대한 과거와 방대한 미래의 시간이라는 그 개념이 우리 머릿속에서 왔다갔다 한다. 정작 중요한 건 실처럼 얇은 현재라는 지금의 시간인데, 방대한 개념을 왔다갔다하느라 실같은 현재 따윈 관심도 없다. 현재의 축적이 과거이고, 현재를 지나는 이 시점이 미래를 여는 문의 통로 쯤이라 생각할 수 있다. 사고의 강의 흐름을 조절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훈련하고 관리해야 한다. 정신의 숲을 가꾸듯, 사고의 흐름을 내 스스로 선택해서 조절해야 한다. 어찌되었건 생각은 동시다발적으로 수 많은 것들이 떠오르는 하나의 스케치북 같은 혹은 무중력 상태의 방과 같지만, 보다 방대한 정신, 무의식들이 그 곳을 통과하며 포괄한다. 내가 가꾸는 그 생각의 방에 쓸데 없는 것들을 밖으로 걷어차고 적어도 내가 긍정적이고 행복이라 칭할 수 있는 것들로 던져 넣어야 한다.
  깨닳음의 연속, 나아짐의 연속, 꿈과 사명, 나로 수렴하는 삶.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런 삶들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 친구들, 내 사업체, 그 것들과 함께 뒹구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교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목표와 꿈, 돈, 사업체, 사람들, 이런 모든 것들은 덤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더디보이지만 그래서 무시당하고 어눌해 보이겠지만, 그 대상이 천재임을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의 삶이 누군가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고 내 사람들이 나와 우리를 볼때,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상이고 삶이어야 한다. 더도 덜도 중요한건 없다. 이 삶들이 모여서 하나의 구심력을 갖게 될때, 우린 더 빠르게 굴러가게 될 것이며 그러다가도 멈춰서서 서로를 북돋아 줄 것이다.
  인정 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중요한 감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스스로의 인정만큼이나 가치있는 인정이 또 있을까? 그런 사람이 된다면, 나 스스로에 목숨을 바칠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런 남자가 된다면, 날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더 아름답고, 더 멋져지자. 과거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내가 그렇고, 앞으로의 내가 그럴 것이다. 그 곁엔 스스로를 인정해주는 내가 있을 것이다.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내 삶은 저 빛처럼 돼야 해. 끝없이 올라가지


제이, 당신은 그 썩은 인간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야.




완벽하고 거부할 수 없는 상상력이야






내 삶은 저 빛처럼 돼야 해. 끝없이 올라가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대사들,,, 내 마음속 대사들..

  믿음의 전염성과 그 믿음의 힘은 무한해서, 스스로가 신의 아들이라 믿고 그의 가난한 친부모가 실제의 친부모가 아니라 믿고 16살의 나이에 떠나 기회를 잡았다.

  부패하지 않는 꿈을 가지고 사는 위대한 개츠비.


  난해한 화면들을 지나치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무거운 대사들과 믿음의 조각들이 자꾸 생각난다. 결말은 중요하지 않고 돈 역시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부패하지 않은 꿈과 목표, 삶의 과정이다. 여자가 이기적이고, 썩어빠진 사람들이지만 그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게 아니고 그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한 남자의 꿈과 믿음이 그 남자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들은 고스란히 그 남자의 무게가 된다. 삶의 무게가 그 남자의 무게가 되듯, 또한 스스로를 인정해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남자가 되듯,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해.
  차도 집도 옷도, 주변의 사람들마저도 그저 도구에 불과하고, 돈 역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쓰여지는 것일뿐.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내가 나를 바라보듯 영화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삶의 방향성을 새로이 잡는다.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모든 것은 도구가 되어 존재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들이 날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그것들에 목메이고 있진 않나? 그것이 오히려 내 꿈이 되어버린건 아닌가? 
  내가 아티스트의 재능을 사고,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입이 되고, 내 눈이 되며, 내 계획을 토해내면 행동으로 옮겨지는 그런 삶을 나는 살고 있나? 


2013년 5월 4일 토요일

무심

앎에 모른척 한다는 것
그 모른척 하는 날 니가 다 안다는 것
눈은 항상 서로를 쫓는다는 것
익숙한 거리에서 시간이 멈춘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인정한다는 것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옳고 그름

  너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직시할수 있니? 맞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스스로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니? 니가 진실과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저 오랫동안 굳어진 사회의 전통같은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알수 있지 않나? 전통은 어디서부터 오는걸까? 내가 젓가락과 숟가락을 쓰는 것이 맞는가? 이 순간에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닌건가? 그렇게만 생각하는건 다행인지도 모르지, 아예 지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 아닐까?

  옳고 그름은 없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전한 답이고, 나 자신에게 솔찍한거지. 애초에 강함도 없어. 내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내가 강한거야. 자신감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거야. 내가 자신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변에서 내가 자신감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지. 바로 그 때 자신감이 있다고 여길 수 있는거야.

  스스로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너는 가지고 있는가? 어떤 역경과 수모와 위선들을 마주하더라도 그 귀싸대기를 너는 날릴 수 있는가???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내가 알고 있는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만약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주면 좋을까?

찬란하게 달렸던
눈부신 경주 이야기를 해줄까?

아니면
숨 가쁘고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경주 이야기를 해줄까?

삶이 네게 건네주는 
역경과 시련
그리고 땀

모든 삶이 정각에 출발하는 건 아니야
모든 삶이 정각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지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겠니?
불리한 패를 쥐고도
두 배로 내기를 걸 수 있겠니?

잘 살꺼야.

  행복한 사람들은 대게 페이스북이나 카톡등에 행복한 모습을 올리지 않는다.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은 고함을 치지 않으며, 풍요로운 이들은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 따로 시간을 내어 걱정하지 않으며, 빈자는 도리어 빚걱정을 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잘 살꺼야, 잘살꺼야,, 라고 지금 연신 얘기한다.

나는 행복하다 드러내고, 고함을 치고, 허세를 부린다. 나는 건강걱정을 하고, 빚걱정을 한다.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대화

오늘도 난 어둠속에서 이야기 하네. 
너와 했던 이야기들, 너와 나눴던 이야기들,
또 난 혼자서 너와 이야기해.

니가 없어도 니가 갔어도 난 너와 이야기해.
우리지만 우리가 아니야.
흩어졌지만 함께야
별개지만 함께이듯,

익숙한 거리에서 너와 이야기해.
함께 팔을 괴었던 테이블에서 이야기해.
같은 커피에 향을 음미하고, 만질수 없지만 느껴.

문득 문득 시간이 멈춰질때, 너역시 그러할거야.
내 멈춰진 시간의 앞에 니가 멈췄을테고, 그 후에 또 멈출거야 너의 시간은.

이것은 습관이 아니야. 도리어 성격이 되어버린거지. 그리고 성향이 되었어.
그 향기가 나는거야. 나의 향기와 너의 향기가 허공에 흩뿌려져 우린 그 향기를 맡아.

손끝에 베인 이 벽돌의 그 쓸리는 느낌처럼 손이 기억하고 내 피부가 널 기억해.
심상을 마음속에 소용돌이로 불러일으킴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것,
느낌을 손끝으로 기억의 파장을 눈앞에 퍼트릴 수 있다는 것,
마음속 영사기에 너를 투사한다는 것,
그래서 온전히 내 앞에 니가 있다는 것. 
대상과 상황이 송두리째 사라진다해도 그것 또한 의미 없는 것.
죽어버린다해도 마음 속에 너는 죽지 않는다는 것.

이미 영생을 경험하고, 영원이란 알수 없는 피상의 것의 끝자락을 내 손가락으로 잡고 있다는 것.
죽어도 살아있다.

하루살이 -김사랑

지난 긴 하루의 적막을 깬 내 얘기에
넌 왜 고개 숙인 채 눈을 감기만 해
단 하루만 이 순간 만큼은 나의 연인이기로 해
난 널 보낼게 잠이 들 나이기에

이건 아닌데 늘 앞에서면 눈물을 참은 나인데
단 하루만 이 순간 만큼은 나의 연인이기로 해
난 널 보낼게 삶이 끝났기에
다음생엔 꼭 나여야만 해 나에게 넌 약속해
다음생엔 꼭 너여야만 해 꼭 너이길 난 원해

단 하루만 이 순간 만큼은 나의 연인이기로 해
난 널 보낼게 삶이 끝났기에

가수 김사랑 생애

김사랑


초등학생 때 피아노를 시작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구형 컴퓨터로 작곡을 시작했으며, 작사·작곡·편곡·연주·믹싱에 이르는 앨범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서 담당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홍익대학교 주변 클럽에서 '청년단체'라는 밴드의 보컬로 활동했고, 학업 때문에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지자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자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99년에 김사랑은 만 18살의 나이로 1집 앨범 《나는 18살이다》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솔로 음악가로서 데뷔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에는 2집 《Nanotime》을 발표하고 활동을 하다가 2002년 12월에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대체복무에 들어간다.[1]그리고 소집해제 후 2년동안 앨범 작업기간을 더 가진 뒤에 2집 발매로부터 6년만인 2007년에 3집 《U-TURN》을 발표하고 〈2007 파이어볼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10월에는 19일과 20일 이틀간 U-TURN 발매기념 콘서트를 열었다.[2][3]

-위키피디아

위로 -김사랑

기억해 들뜬 밤을 지새우며 떠난 너와 나의 축제 그 밤
어두운 물결 위를 비추던 불빛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 추억 나에게만 멈춰 있던 기억에
더는 보지 못할 니 모습들만 이별을 강요해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

아직 난 늘 같은 시간 속에 머문 널 보내지 못해 그 밤
어두운 물결 위를 비추던 불빛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 추억 나에게만 멈춰 있던 기억에
더는 보지 못할 니 모습들만 이별을 강요해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이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 이미 널 닮아 버린 나 아직 니가 필요해
이렇게 기도해 너의 마음 속엔 없는 바다에 넌 왜
왜 이별을 강요해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 너에게 난 편치 못할 병이라 생각해

Loser -김사랑

네 눈 가득찬 욕망의 tape
거만한 음악의 chime 이 끝나는 날
너의 곁엔

끊임없는 너의 같잖은 새 경험담
이젠 난 진저리나
헛늙은 아이들의 훈계는 돈의 노예에게나 해

my way 난 내 삶의 경험
내 마음, 내 뜻대로 해
시커먼 잔에 감춘 너의 계획 너의 후회

니 삶이 남긴건 꼭 판에 박힌듯한
진부한 얘깃거린걸
널 닮은 아이들의 준법은 단 한번의 요행

네 눈 가득찬 욕망의 tape
거만한 음악의 chime이 끝나는 날
너의 곁엔 너 이외엔

my way 내 삶의 경험
내 마음, 내 뜻대로 해
시커먼 잔에 감춘 너의 계획
그 틀안에 날 가두는 너

my way 난 내 삶의 경험
내 마음, 내 뜻대로 해

이랬다가 저랬다가..

세상을 다 가진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가도, 이것 아니면 안되는 어린아이의 마음..

잡고 싶은 기억들만 가슴속에 새겨두자.

괜찮다가도 안괜찮다....





괜찮다가도 안괜찮다.
삶 속에 내리는 빗속에 내가 서있고,,,
정말 뭐가 됐든 상관없다. 뭘 원하고 원하지 않았든,,,,
내가 강하지 못함에 연유하지만 내 젖어드는 이 마음이 너무도 무기력해. 내가 뱉었던 삶의 이정표들이 파되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지는데 누가 볼까 무섭다.
사실, 이제서야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또 다른 이정표가 들어선지도 모를일이지만, 이것도 저것도 그 무엇도 내게 확신을 주지는 않아. 확신이 부재한 이 별의 삶에서 나는 괜찮다가도 안괜찮다. 어디에 있나 나는? 늘상 내가 서있는 이 곳이 내가 있는 곳이라 인정했는걸,,,
근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에 내가 확실히 존재하나? 두발 딛고 있는 이 곳이 확실히 내가 있는 곳인가 아니면 내 마음이 머무는 그 어떤 곳이 내가 있는 곳인가?
  거짓과 위선의 조각들이 싫었었지, 내가 맹목적이고 우상이 되는 것만큼이나 싫었던 그 포인트가 나를 다시 용수철처럼 끌어당겨 그 곳에 날 있게 한다.
  사이비 교주의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는데, 지금 나는 하찮은 보통인간 나부랭인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도 영원을 피해가진 못하는데 과연 그 것은 또 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넬의 김종완이는 오늘도 기타를 쓰다듬고 사랑으로 사는데, 손정의는 삼백년의 회사를 만들어가고, 리차드 브랜슨은 그 하얀치아를 뽐내는데 나는 고작 이 갈대를 손으로 움켜쥐고 나약한 신음이나 토하고 있네….

  그 전에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나의 위선 속에서 경계가 희미해져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지금 원하고, 원했던 것들을 지금 원하지 않고, 아이들 시소놀이처럼 나를 들었다놨다.

  내 안에 사는 꼬마아이는,,,,,,,,,, 운전을 하다가도, 마우스를 움직이다가도, 혹은 이렇게 음악을 듣다가도 내게 떼를 쓴다. 엄마를 내놓으라고,,, 자기는 그 것만 있으면 된다고 외치네,,, 포르쉐 따위는 필요없데….



  그렇다면 결국엔 똑같은데,,, 결국엔 다 부질없고 똑같은건데…. 어떤 사랑도 다 똑같은 건데,,, 극과 극은 통하는 거니까. … 다 필요없는건데…..

그래서 나는 곧 괜찮아질텐데….. 그 괜찮아진다는 것도 싫다. 가장 슬픈 것은 내가 이 뜨거움을 까맣게 잊는다는 거니까….




비가 내린다. 나는 비속에 서있다.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

원하는게 뭔지, 행동하지 않았던, 혹은 그 것을 묵인했던 나란 놈을…. 그 것또한 나임을,,,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 것도 나였고, 그 괴물이 된 것도 나였음을…..
  가지 말아야 할 곳은 가지말아야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피해야 한다. 해가 되는 것은 보지 말아야 하며, 나를 갉아먹는 사고를 떨쳐내야함을 기억해.

  강함은 내가 스스로의 가지치기를 통해 이루는 것이고, 나를 가꾸는 습관같은거다. 오로지 정신을 집중해. 보이지 않는 해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자그마한 여지를 남겨주지 말아야하며, 나약함이란 놈에게 나의 빈틈을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 잡초를 고르듯 나의 정신 역시 골라내어 풍요로운 아름다움으로 가득차기를.,,, 진정 이 다짐이 나의 마지막 다짐이 되리라. 조금만 더 힘을 내라 ... 넌 더 강해질꺼야. 아프고 아파해라.
  그래도 언젠가는 원했던, 혹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의 한 가운데에 있잖아. 적어도 원하지 않았던것들로만 가득 둘러싸여 있진 않잖아.

2013년 4월 8일 월요일

서재.

  언제나 그랬듯, 강함은 내 안에 있다. 그 것을 인식하느냐 혹은 망각하느냐의 차이일뿐. 내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행복 역시 그러하다. 슬픔, 기쁨, 환희, 깨닳음, 앎, 지식, 지혜, 다시깨닳음, ,, 역시 모두 내 안에 있다. 나는 나의 서가에서 하나의 책을 끄집어 내듯, 이런 모든 감정과 느낌을 내 정신의 선반에서 끄집어낸다. 





  나는 강해져야 하고, 강하며, 강했다. 어찌되었건, 그 감정과 어렴풋한 느낌이 긴 꼬리를 가지고 내 안을 아우른다. 내 스킨향이 당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느껴지듯, 나의 아우라 역시 그 어떤 기운으로 당신들에게 느껴진다.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가고자하는 목적지가 정확해야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원하는 것과 목적지는 내 안에 있다. 비록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어렵고 추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것은 내 안에 있다. 그 말은즉슨 나는 안다는 것이다. 





2013년 4월 3일 수요일

내 두 눈.

오전 11시 30분.
오후   2시 10분.

나의 꼬마는 목놓아 운다.
숨도 쉬지 못하고 운다.
꺼억 꺼억.
연신 운다.

미안. 널 나는 다독일수 없다.
살아남아라. 죽진 않으니까.
죽어도 나와 같이 죽으니까.
그래서 우린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거야.
같이 죽을 수 있으니까.

한계 -Nell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니가 필요로하는 나의 모습이 같지가 않다는 것. 
잘못된건 아니지 않나요. 미안해할일 아니지 않나요. 
그런데 왜 또 그렇게 자꾸 날 몰아세우는 건데. 도대체 뭐를 더 어떻게 해. 


달라졌구나 참 많이도 변했구나. 난 여전히 그대론데 넌 달라져버렸어. 근데 혹시 한번쯤 반대로 생각해본적은 없었나요. 

빼곡히 들어서 의미라 했지만
나에겐 공허하기만 한 일방성의 무의미한 방랑과 방황의 차이.

난 몇마디의 말과 몇번의 손짓에 또 몇개의 표정과 흐르는 마음에 울고 웃는 그런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대체 내게서 뭐를 더 바라나요. 내가 줄 수 있는 그 이상을 줄 수 없음에 미안해요. 

백야 -Nell

난 니가 필요해
난 오늘도 이렇게 내 안에 남겨진 너의 조각들과
또 사랑에 빠지고 다시 이별을 하지, 넌 어떤지
난 니가 필요해
널 지우려할 때마다 모든게 무너져내려 송두리째
끝없는 시간에 이 모든 공간에 짙게 물든 너의 숨결만이 가득해
come back to me,

난 오늘도 이렇게 내 안에 남겨진 약속의 조각들, 기억의 흔적들
애써 맞춰가며 또 하루를 보내. 넌 어떤지
난 니가 필요해
널 지우려할 때마다 모든게 무너져내려 송두리째
끝 없는 시간에 이 모든 공간에 짙게 물든 너의 그 숨결만이 가득해
I can't get over you. I can't get over you.
You just keep shining on and on through my time. i can't get over you.

노력해도 안돼. 내가 숨을쉴때마다 너의 기억이 내게 말을 거는듯 해.
Come back to me,
난 니가 필요해.
너를 떠올릴 때마다 시간이 얼어붙어 송두리째. 노력해도 안돼
내가 숨을 쉴때마다 너의 기억이 내게 말을 거는듯 해.

남겨지는 것도 떠나보내는 것도 모두 내 몫이겠지
마치 영화처럼, 거짓말인것처럼 돌아올리 없겠지. Come back to me.

2013년 4월 2일 화요일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돈을 번다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꺼란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어찌되었건 일은 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을 하고, 돈을 버는데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이 상황에도 어렵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복잡다단한 쓸데없는 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일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돈을 번다는 행위와 어떤 수익을 올리는 이 일이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쉽다는 결론을 내린다. 내가 하는 고민들 삶의 여정에 대한 예상과 피드백,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정의 일련의 과정들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존의 문제보다 내겐 더 어렵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오히려 먹고 사는 것이 쉽다. 훨씬 쉽다. 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돈이 아무것도 아닌게 되었네??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꿈꾼다. 내가 바라는 삶과 내가 예상하는 삶이, 그리고 실제적인 이 삶이 일치하길 바라고 원한다. 삶과 일, 사랑과 꿈, 건강과 정신, 바라는 모든 것들이 비록 최고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벨런스가 유지되었으면 한다. 결심과 나의 말은 주변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고, 내 정신의 한 조각에 주변이 요동을 친다. 내 비전이 그들의 비전이 되며, 나의 꿈이 그들의 삶의 이유가 된다.

  

  나는 노력이 없는 인생을 산다. 참으로 복된 삶이라 생각한다. 다른 이의 눈에는 어쩌면 무척 노력하는 사람으로 비춰질지도, 혹은 전혀 아무일 안하는 사람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 같지 않다. 다만 끊임없이 머리를 움직이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내 목표와 목적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어찌된 영문인지 어딜가고 누굴 만나나 나는 참 복된 사람임이 느껴진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몇번 만나고 이야기 하고, 얼굴을 맞댄것 뿐이다. 하지만 거의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느낀다. 그저 느끼는 것뿐이다. 사실과 다를 수 있지만, 일이 잘 풀리고 별다른 어려움이나 노력이 없이도 상황이 진행됨에서 나는 그 증명을 또 느낀다.

  일 속에서 나는 상상과 생각으로 나의 목표와 목적지를 다시 잡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다. 비록 내가 어떤 혜택을 받고, 은혜를 받더라도 굽신거리지 않는다. 그런 배려가 나는 나에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어떻게든 그 사례를 하면된다. 금전적이든 정신적이든간에 언젠간 내가 그 배려에 더 얹어서 갚을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기에 그 당당함이 선행한다.

  쓸데 없는 소속감이나 비효율적인 어울림을 하지 않는다.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거대하고, 소중해서 지금 눈 앞의 사사로운 이익에 현혹되지 않는다. 배부른 소리라 해도 듣지 않겠지? ㅎㅎ 이것 역시 나중의 내가 증명해낼테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실제로 눈 앞에 드러나게 만들어야 한다. 이 표면적인 세계에서 숨겨진 그 무엇, 그 것이 소중한 것이다.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과연 그것이 소중한 것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것이 비밀일 수 있겠는가?



  나의 신께 기도한다. 감사하고 죄송스러우며 날 항상 지켜달라고…
나의 사고를 주신 신께 감사하다. 이 것은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이기에…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항상 난 홀로 남지.


항상 난 홀로 남지.
내일 누군가가 나에게 찾아온다해도 지금의 나는 항상 혼자 남아.
애정결핍의 정점을 나는 이렇게 매일매일을 찍는다.
하루하루가 정점이고, 최고의 날이다.
빌어먹을,,,,,,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이 별의 삶..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일을 하고 꿈을 위해 살며 늙어간다. 끝은 알 수 없고 한계가 없는 이 삶에서 한 조각 표지와 목적지 적힌 약간의 종이쪼가리를 들고 하루하루에 임한다. 경지에 오른 예술가들을 경외하고 내 삶의 조각도 선대의 그 경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인생은 예술이다. 내 영역과 내 업에서 잘하는 것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끌어올리는 것이 내 손에 들린 종이쪼가리다. 한계가 없는 이 별의 삶.. 돈과 일, 업적,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언리미티드를 벗어나는 나만의 삶. 미치지 않고, 이 별과 내가 아슬아슬하게 조우하는 인생. 모두가 가진 그 꿈들에서 볼 때, 내가 정신병자가 지껄이는 흩어지는 문장과 단어들이 아닌 미치지 않는 삶. 나만의 삶과 온전한 나의 인생에서 나 자신 스스로가 인정하는 종이쪼가리의 목표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그렇게 온전히 분리해서 발가벗은 나를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엔 내가 주변을 다 먹어치우겠지. 내 옆과 앞과 뒤에 있는 모든 이들은 나로 인해 살아지고 나를 위해 살것이다. 결국엔 모든 이들, 일들이 그렇게 될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며, 그래야 마땅하다.

  혼자 이렇게 동떨어져 있는 이 독보적 존재가 오늘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를 지나치고 나를 알지 못하는 이 곳 주변 사람들의 눈엔 그냥 한 사람일테지만 진실과 진리와 조우하는 단 한사람인줄은 꿈에도 모를테지.. 무시하기엔 그 존재가 너무나 커서 내 스스로도 아찔하단 생각이 든다.

2013년 3월 16일 토요일

그림자 놀이


                             -옥주현

난 고단한 줄도 모르고
그대 곁을 늘 맴도는데
내 소란한 맘도 못 듣고
어딜 바삐 나서시나요

난 마치 그림자처럼 그댈 쫓아봐도
날 그새 다 잊었나요 누굴 보시나요

하루만 하루만 그댈 보려다
갈 곳을 잃은 내 발걸음
여기에 여기에 내가 있어요
그대의 깊은 마음속에

나 그대 곁에 잠들어도
그댄 나를 안질 못하고
단장을 하며 비춰보는
거울 속에 나만 없네요

왜 오늘 슬퍼 보여요 날 떠올리고 있나
큰 이별도 끊지 못한 사랑이 서러워

하루만 하루만 그댈 보려다
갈 곳을 잃은 내 발걸음
여기에 여기에 내가 있어요
그대의 깊은 마음속에

오늘은 좋은 꿈 꾸나
입가에 번진 그 미소
달콤할수록 더 아플 아침도
우리 잠시만 잊어요

오늘도 우리 긴 꿈을 꾸어요
보아도 보아도 그리운 얼굴
손 끝에 닿질 못하는데
사랑해 사랑한다 외쳐봐도
어둠 속 깊이 묻히네요

얼마나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대여 부디 기억해요
여기에 여기에 내가 있어요
서랍 속 깊이 사진 속에

그대를 난 기다려요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오지은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곳

누가 나를 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

같은 얘기를 목이 쉬게 같은 길을 발이 부르트게
걸어도 벽이 높아서 나도 오를수밖에 없어

차갑게 퍼붓는 비보다 마음속에 내리는 비가
나를 떨게 해. 이젠 앞에 떨어지는 길만 남은걸까

바래왔던 아주 작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따스한 집에 돌아가는 걸

바래왔던건 아주 작은 땀방울의 소중함을 알고
아름다운 미소를 알며 따스한 네게 돌아가는 걸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누가 나를 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너는 저 높은 탑에 나는 사람들 틈에서 저 높은 곳에....

원래부터가 이건 니 노래였다. 내가 듣던 때, 미처 몰랐던 니가 듣던 그 때부터.
똑똑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삶을 사는게 아니다. 내가 똑똑하니까 나에게 아픔이
없고 행복만을 만들어낼거라 착각하지들 마라. 보이는게 아는게 예상하는게 눈 앞에
영화처럼 펼쳐지기 때문에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나는 눈멀지 않은 자다.



헤이 밥,,

안녕.
오랫만에 너의 글을 보니 반갑다
내가 상상했던것들은 
늘 내가 이미 살고있는 것처럼 
선명했기에
어떤 계기나 이유였던 내옆에 네가 없단 
단순한 사실이 아직도 생소할때가있어

그래도 살아지고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날 모른척해버리는 흐르는 계절과 시간이
서글프기도하지만
여전히 난 
널 생각하거나 너와 대화해도
웃고 말하게 돼

너 같은 사람은 너 뿐이란걸 
내가 늘 느끼고있기에
널 만나 사랑했을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넌 늘 내가 아는 
제멋대로지만 논리적이고 현명한
무드라곤 없지만 세심한
말장난투성이지만 진실된
* 창 * 이야

너의 선택이 어떤 것이든
난 네가 믿는 것들을 믿었고 지금도 믿어

우리가 지금 함께가 아닌것이
아직도 서글퍼질때가 있지만
나 역시 늘 네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게 힘이돼
그래서 난 여전히 널 느끼고 기억해

또 봄이 오는것같아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ㅋㅋㅋ

아 배고파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_

귀를 막으면 조용해 지나요, 눈을 감으면 안볼수 있나요.
맘을 닫으면 그 어떤 상처도 우리 받지 않을거라 믿었는데
지나고나서 다 들리더군요. 지나고나서 다 보이더군요.
지나고나서 모든 아픔이 물밀듯 그렇게 밀려와 참 힘들더군요.

함께 있으면 머물러지나요. 머물러지면 행복해지나요.
떠나려하면 어떻게 하나요. 붙잡아봐도 떠나려 한다면
지나고보니 다 똑같더군요. 지나고보니 부질없더군요.
생각해보니 함께 하고 있을때도 우린 여전히 많이 외로웠죠.

2013년 3월 12일 화요일


독보적 존재가 여기 있다.

  운명은 없다. 적어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고 행위하고 그에 수반되는  결과들이 신의 섭리일 뿐, 나에게 닥쳐온 일들이 운명일리 없다. 운명이라는 미명 아래 나를 더불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생의 변명을 저질렀는가? 그 변명이 운명의 등뒤에 숨어서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나도 너도, 지금 이 시점부터는 운명이란 걸 애시당초부터 생각하지 말자. 그 것의 존재도 없다라고 여기자. 우리는 삶을 개척하고 우리의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 결단, 행동, 결과들이 일어난 시점에,, 그 시점이 한참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신의 섭리 비슷한 것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뿐이다. 운명이라 생각하면, 얼마나 수동적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나. 그 변명으로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지만, 그게 행복을 향한 길은 아닌걸,,,, 머리는 멍청해지고, 자극을 기다린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편하게 살자는 인간의 가장 좋지 않은 정신의 파트다. 
  삶과 나를 쟁취하자. 되도 않는 노력이 아닌, 열정과 행위에 기반하는 행동하는 삶을 살자. 뜨뜨미지근하게 살아가도 사는 것이고, 열정적이고 나를 불사르는 삶을 살아도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사는 것은 똑같다. 죽을 때까지 마지못해 사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내 손위에 쥐어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나를 더불어 그들에게도 행동이 먼저인 영혼이 되게 만들자.
  인생의 수필에서 돋보기로 나는 철자 하나에 몰입했다. 그 철자 하나에 내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내 시간을 허비했다. 그 철자는 내 인생의 수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게 맞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 철자들이 모여서 한 권의 책을 이루지만 그 철자가 다는 아니다. 나는 돋보기로 피로한 눈을 가지고 그 철자들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중요하지만 결코 중요하지 않는 그 철자를…

  나는 독보적인 존재다. 여기 그 독보적인 존재가 고뇌하고 고민하고 걱정했었다. 나를 떠나서 내 위에서 날 바라본다. 부족하지만서도 가슴과 이상 속에 품고 있는 그 꿈의 크기와 신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그가 나는 참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내 주변 어디서도 그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고, 정말로 정말로 흔하지 않은 사람이다. 흔하지 않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특별한 존재다. 나는 나를 놓는다. 내 안에 흘러드는 사람들과 나를 통과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떠나는 사람들. 그 것은 그 사람들의 선택이었고, 그 사람들의 딱 그만큼의 복이다. 

  내가 나를 걸고 던지는 그 도박과 실험들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나를 위대한 영혼으로 가꾸어주었다. 나에게 다가오라. 그럼 내가 널 끌어안을 것이다. 나에게서 떠나고자 다짐하라. 그러면 그 전에 널 밀쳐주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고, 내 감정을 가지고 당신들에게 나의 도박을 던진다. 나는 나를 걸었다. 과연 당신들은 자신들을 나에게 걸었나?

  아랫배 저림의 삶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어. 지금 나는 역시나 아무도 없는 이 커피숍에서 사색과 생각을 한다. 일하다가 문득문득 생각에 빠지고, 간헐적 통찰이 나에게 다가온다. 이 나와의 대화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듯, 앞으로의 나 역시 그 퇴적된 것 만큼 모든이들과의 격차를 벌릴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 시작한 그 3살때의 나 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엄청난 고통과 고뇌의 강들을 셀 수도 없이 건넜다. 자극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티비를 보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 히히덕거리는 와중에서 느끼는 저렴한 소속감 따위도 외로움과 괴로움을 식량삼아 곱씹었다. 시덥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리더가 되어 마치 뭐라도 된 사람인양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는 30년을 살았다. 이 엄청난 퇴적된 지층에서 나를 따를 순 없다. 나를 능가할 수도 없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내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본적도 없고, 그런 존재를 느낄 수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사고, 시덥지않은 철학들을 내가 삼켰고 비웃었다. 나를 붙잡을 수 없으니, 포기하고 날 지켜봐라. 그리고 나와 함께 해라. 그게 내 성 안에 들어오는 길이다.

  내 머릿속에는 선반들이 있는데, 그 선반들 위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과 가봤던 곳, 맡았던 냄새, 만났던 사람들과 수많은 표본과 샘플들, 어떤 것에 대한 내가 반응한 경험, 생각들의 재료들과 수 많은 심상이 깃든 단어들, 음악들, 이루 말할 수 없는 색채들과 소음들… 이 모든 것들이 억겹의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다.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고, 강철만큼 강하다. 30년 동안의 그 재료들을 가지고 살았고 그 선반들에 올려져 있는 것들과 얽혀져 있는 것들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

   

2013년 3월 9일 토요일

여기가 나만의 공간


  모두가 자기만의 시간들을 갖기 위해 이 공간을 떠났다. 반대로 이 공간이 나만의 공간이기에 나는 오늘도 하루를 마감하며, 이 곳에 앉았다. 저녁 아홉시에 이 밤만큼이나 다크한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크레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마치 생수처럼 나는 이 커피를 들이킨다. 스탠드의 불빛 아래 어지럽혀져 있는 서류들 위로 내 손은 시끄러운 키보드를 연신 눌러댄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고, 해야할 생각들 역시 태산 같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정체되어 있다. 응축된 에너지를 끌어모으기 위해서겠지. 더 강해지고 강해지는 변방 무사의 마음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그날 밤처럼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질 아침을 미리 본다. 보름달이 뜨는 그날 밤처럼 뜨겁던 나도 내일이면 시들어진 장미가 될 것을 미리 본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나를 믿는 이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이들이 있음에 가슴 뛴다. 그들이 존재하므로 내가 존재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이 것은 인간관계나 대인관계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 영혼을 가까이 하고 싶은 이들의 마음에 내가 공명한다. 마치 거대한 종의 울림처럼 나는 그들과 그들의 서로 다른 영혼만큼이나 여러가지 음을 함께 낸다. 때론 가지가 잘려나가듯, 그래서 생살이 드러나듯 나란 나무에는 움푹움푹 패인곳 투성이지만, 더 거대해져가는 둘레만큼이나 내면의 나이태가 멀어짐을 나는 느낀다.

2013년 3월 7일 목요일

Immortality

불멸..

  영원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 변함 없는 진리다. 그 강한 무쇠도 바닷바람 앞에서 오래지 않아 녹을 드러내고, 점차 사라져간다. 풍성하던 나무들도 낙엽으로 사라지고, 몇백년을 가는 나무도 그 수명이란게 있다. 내 머니클립의 돈은 오만원권, 만원권, 천원권,,,, 몇십장이 꽂혀있다 하더라도 그냥 나를 통과해 누군가에게로 흘러간다. 나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거래하던 수 많은 어제의 이들이 사라졌고, 오늘 또 새로 생겨났다. 사랑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내 안에 통과되었고, 또 다가온다…

  내 걸름망에 걸러진 것들… 내 계좌에 유지되는 잔액들,,, 무쇠처럼 변하긴 하지만, 더딘 것들…. 그 더딤… 천천히,,, 내 수명보다 긴 것들을 들여다보자. 어쩌면 우리 유한한 인간의 존재에서 그 더딘 것들이 오히려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더딤을 들여다보면,,,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것은 시간이 멈춰져 있는 것처럼 나에겐 마치 영원이 될 수 있는 착각을 안겨줄 수 있다. 내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는 내가 죽더라도 몇백년은 가겠지. 내가 세운 회사는 내가 죽어도 이어져 가겠지. 내가 가진 땅들은 적어도 그 자리에 있겠지. 나보다 더 더디 변하는 그 어떤 마음은 내 곁에 영원처럼 날 지켜주겠지. 그래서 난 행복한 영원의 착각을 만끽하며 순수한 눈빛으로 세상에 놀러 나갈 수 있겠지.


  더디게 흘러가줘, 내 주변의 것들아. 내면의 나란 꼬마 아이가 엄마가 사라진걸 눈치채지 못하게,, 그 꼬마가 겁을 내지 않도록,, 소중히 다뤄줘. 엄마를 찾거든 엄마가 되어주고, 친구를 찾거든 소소한 친구가 되어줘. 맺힌 눈물 그대로 너에게 웃음을 지을테니까. 그 아이는 내게 너무나 소중해서, 난 어쩌지 못해. 근데 그게 나야. 그게 바로 나야.. 원래의 나였던 거야.

좋겠다..

외로움.
너넨 좋겠다. 그렇게 무지해도 같이 이야기할 친구가 있어서..

내 꿈과 비전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해. 동료와 동지가 필요하다.

어떤 결혼을 해야 행복할까?



모든 걸 기부하고 떠난다면??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면??


삶이 정체되면 그때그때 변화를 주어야 한다.

  내가 사는 이 나의 삶이 정체되었다고 느낄 때, 그때 그때 변화를 주어야 한다. 삶을 바른 방향으로 갈수 있게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끔 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먹고 자는 곳을 옮긴다거나 일어나는 시간 등의 패턴을 바꾼다거나 하는 행동으로 일상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똑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하는 것보다 다른 곳에서 출퇴근하고, 전혀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하는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계속되는 이 일상의 패턴을 도미노처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
  사무실의 배치를 바꾸거나, 집안의 배치를 바꾸는 것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행위이지만 사고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전혀 다른 공간과 제품들로 채우지는 않지만, 배치를 바꾸는 약간의 작업만으로도 내 사고는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마치 누군가의 생각의 방향을 전혀 다른 질문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처럼, 혹은 활동적인 운동을 함으로써 활동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사고를 활발하게 할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없이 누군가에게 믿음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년에 도달할 "  " 목표에 대한 확신도 없이, 누군가에게 내 목표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것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그래서 그 목표 달성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날 따르는 누군가가 완벽한 준비를 한다해도 내 스스로가 겁이 난다. 믿고 따르는 사람은 완벽한 준비를 향해 달려가는데, 그만큼의 일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난 뭐라 말해야 하는가?

  사람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더 늘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더불어 그만큼의 매출과 이익이 받쳐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매출대비 이익이 상회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망하는 것과 다름없다. 내 수중에 일을 그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직업과 돈을 주고, 덤으로 파워와 사회적 위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어쨋건, 우리는 덩치를 키우고 돈을 회전시키고, 매출을 끌어올려야 하며,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 재무적으로 인사적으로 마케팅, 비전, 연구개발 복지 등의 밸런스를 유지시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비전 아래 일한다. 우리를 불사르고 열정을 다해 일을 한다. 그것들을 제공하는 것은 나 자신이 되어야 하고, 이 밸런스들을 유지하는 것도 내 일이다. 파워의 소스가 내 스스로가 되어야 하며, 정보의 수렴구가 나 자신이어야 한다. 

  돈은 의미가 없다. 돈은 그저 기준이고, 어떤 척도이자 점수판일 뿐이다. 십년, 이십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생각하게 하자. 지금 버는 돈은 그 때의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고, 비교대상 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돈은 사람에게든 회사에게든 모두 재투자한다. 선순환의 톱니바퀴에 맞물릴때까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재산과 자본, 회사와 사업장, 매장과 창고, ,,, 무엇보다 사람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