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1일 수요일

09년 9월 21일


090921

  뜨거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해도 나는 울지 못한다.  어제의 눈물이 오늘 흐르는 것이 나는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다. 물이 휴지에 스며들듯 나의 엎질러진 감정 또한 눈시울로 스며든다. 
  삶의 노고가 그들의 삶을 진창에 빠뜨리고, 진흙바닥에 얼굴을 부비게 만든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그들의 사과를 빼앗가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에게서 얼어붙은 심장을 도려낸 사람은 또 누구인가. 될 수 있는한 많이 지껄이는 은유가 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왜인거냐.
  내가 구하는 답을 그들에게 물어보는 나의 이기심은 알고도 지나치는 부끄러운 바리새인의 걸음이었다. 착한 사마리아의 법이 나의 이기심을 심판하기 전까지 나는 범죄자였다.
  오른팔이 아프다. 쿡쿡 쑤시는 근육이 나의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나의 뛰는 심장을 나의 개가 느끼고, 그 개의 심장 소리를 내가 느끼고, 서로가 서로의 심장 소리와 탄력적인 피부의 촉감을 어루만지고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갈증은 생명의 원동력이다. 피곤과 잠은 내 육체를 탈피하게 해주고, 정신의 바다를 유유히 헤엄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화장실에 앉아서 내가 아픈 곳이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 순간, 전에 느꼈던 그 안도감을 다시 한번 느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건강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뿐이다. 그게 사실이다라는 것을...
  건강함, 삶에서의 균형이 오래 지속되는 순간 나는 지금의 나를 잊고 축복인지 저주인지, 미래에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추락한다. 나에게 깊은 집중은 축복이라지만 그 깊이를 가늠한다면 저주이리라.
  어둠이 짙게 깔리고 이 시대의 상징인 번쩍이는 간판만이 허공에 떠 있는 이 시점이 되면, 스치우는 가을냄새만큼 내 귀는 음악을 갈구하고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이 것은 에너지다. 일어나서 잠드는 그 시간까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잠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앉아있지도, 서있지도, 누워있지도 못한다. 죄를 지어 양심으로부터 벌을 받는 심정으로 삶에 임한다. 조용한 이 때에 생각해보면 나의 삶은 참으로 치열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눈에 멋적고 생산적이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그럴 뿐이다. 내 성격이 그렇고 성향이 그렇다. 그리고 생각이 그렇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런 삶의 방식이, 사고 방식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한 부분을 대변해주는 명찰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모두들 가슴팍에 매달고 있는 그런 명찰 같은 거다.
  눈을 감고 암흑 속에서 떠다니는 사념 하나를 붙잡는다. 그것은 마치 밤 호수가에 날아다니는 반딧불 같기도 하고, 잘 보이지 않는 날파리 같기도 하다. 그것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듯 그 반딧불이 날아가 버렸다.
  

  나의 삶은 집중과 열정이다. 빠져듬이 없는 삶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고 지루할 뿐이다. 무언가에 빠졌다면 그 곳에 몸을 던지고, 질린다면 다른 것을 찾아야 나는 살 수 있다. 질렸는데도 그 곳에서 젖은 몸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면 나는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어느 부분이 되어도 상관없다. 나의 집중과 열정을 떠받들어 준다면 어느 정도의 텁텁함은 감수해야 한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내가 그것을 잡아먹고, 또 어떤 새로움을 찾아 짐을 꾸린다. 핏기 스치운 얼굴을 들고 나는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세상이라는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줍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늘의 색과 구름들의 모양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하늘을 만지고, 구름들을 주머니에 담는다. 물론 그것이 나를 만족하게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질리지 않는 삶을 산다.
  빌어먹을 재미를 또 찾아보자.

09년 언젠가


  히히덕거리고 시덥지 않은 모임 따위는 나랑은 안맞는다.  웃기지도 않고, 아무런 생산성도 없고, 찌질한 모임따위는 정말 나랑 맞지 않는다. 기가 막힌 팀웍도 없고, 원대한 목표도 없고, 너무 쉬운 목표가 널부러져 있고 비아냥 거리기만 하는 그런 곳에 나는 왜 있었나. 쾨쾨한 냄새처럼 후줄근한 만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소중한 나의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 박아버린 기분이다. 시간은 이리도 흘러버려 벌써 10시 37분. 내 시간은 그 퀘퀘함 속에 흘렀었다. 이렇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을 하고, 공상을 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 그 시간에 실천이 결여된 상상이나 하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열번을 해서 한번의 아랫배 저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생각은 항상 나를 스쳐간다. 그 것은 때로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될때도 있고, 할일이나 소소한 일상의 파편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인생을 바꿔 놓을 생각의 씨앗이 내 가슴속에 뿌려질수도 있고, 내 생각과 관념을 강화시키는 짧지만 긴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때론 생각과 아이디어, 관념들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감을 느낀다. 그 것들을 잡을 수 있지만 잡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트와 핸드폰을 붙잡고 한시도 놓고 싶지 않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나를 스치는 것들을 붙잡고 마음의 씨앗을 뿌리고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눈시울이 붉어져야 하고 저린 아랫배를 붙잡아야 한다. 붙잡은 것들을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해서는 결코 안된다. 바보들의 언덕을 지나고 그 바위에 깔려 죽고 죽어,, 천재들의 시체들과 나는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들의 지혜를 빌리고, 손을 잡고 나에게 축복을 내려주길,,


  

10년 2월 10일


100210

  가슴 속에서부터 슬픔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답답함의 말로인지도 미천한 내가 가진 협소한 능력 탓일지도 모른다. 끈적한 타액이 나를 몸서리치게 핥아대는데 벗어나려는 곳엔 자처한 질리는 미소가 한가득 있다. 선 자리에서 내 발끝을 바라보며 독보적 존재가 되고자 속삭인다.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완전한 한 개인으로 이 삶을 내 안으로 통과시키고 싶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열망을 나는 소망하는가? 진정 독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입을 닫고 스스로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면, 혹은 아예 미쳐버려야만 그 열망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 길이 옳다가도 저기 보이는 저 길이 옳은 어깨 쳐진 갈대는 자신의 열망조차 쉬이 인정하지 못한다.
  강인한 정신을 원한다면 이 절벽 아래 서서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이에 온 몸이 짓이겨져야 한다. 나만의 온전한 고통과 비명이 계곡을 가득 채우고 너덜너덜한 나만이 남아 바위들의 온 무게와 계곡의 무게와 산의 무게를 내가 버틴다면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나의 눈은 더 맑고 투명해지고 산의 무게만큼 내 몸은 더 가벼워질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흘러 나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돌들을 젖히고 툭툭 털고 일어나며 비명이 아닌 내 영혼을 대신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차가워진 눈은 독보적 존재임을 비춰낼 것이고 두 팔 벌려 갈대 밭을 산책한다. 내가 가진 것 만큼을 원하고, 내가 가질 것 만큼을 요구할 것이다. 나를 마주보고 절벽에 설 것인가, 나의 등 뒤에서 절벽을 바라볼 것인가. 스산한 두려움은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고 타다 남은 한 줌의 재가 될 수도 있다. 시체들과 대화가 끔찍하다고 여기면 저 갈대들과 춤을 추라. 내 등을 바라보고 절벽을 응시하라.
  시간의 바람에 모래 언덕처럼 스르륵 사라지는게 두려워하는 시체의 산이다. 모래를 두려워하는가? 그래봤자 우리도 스르륵 사라져간다.

와쌉요!


오랫만에 네 글을 읽는다는 건 
나에겐 아주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는듯하네
요즘 난 뭘하던 그런생각을해
이게 다 무슨소용이야!

가끔이었던 
감당하기 힘든 
무의미한 순간들이 점점 잦아짐을 느껴


널 만나 보냈던 시간들은 꿈을 꾼듯하다
차라리 몰랐다면 바보지만 행복했을까하는
끔찍한 생각도들었어

만족감이 부족해
너와 내가 채운 공간과 올라온 계단을
나 혼자 채워나가고 올라가는데
아직 내가 모자라고 더디다
너도 알거야 
알기에 내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하겠지

아무도 만나지않고 
하지도않고
그냥 누워서 
생각만하며
나만 느끼고싶어
그래서 잠이 많아졌나바
특별한 문제는 없지
그게 문제야

정신없이 챗바퀴뛰다 
빠져나온듯하네
난 다람쥐가 아닌데.

그래도 니 말처럼 뭔가 있으니
살아가는 거겠지?
ㅋㅋㅋ
아 빗소리 좋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친구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른듯 해. 수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었고, 일어나는 중이고, 일어날꺼야. 그 태풍의 중심에 내가 있지. 카멜레온처럼 살자는 나의 다짐처럼 나는 오늘도 수 많은 나와 마주해. 가끔은 내가 다중인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휩쓸려가는 이 현실의 파도 위에서 어찌보면 실타래 처럼 얇디 얇은 지나가는 지금이라는 순간. 이 순간들이 지나쳐서 과거가 되고 지나칠 것들이 미래가 될테지.
  지나친 것과 지나칠 것들의 찰나 속에 지금이 있는데, 그래서 순간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지만 실상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없지. 과거가 있어서 지금이 있는 것이고, 지금에 미래는 영향을 받으니까. 나 자신과의 대화만 계속하다 행여 내가 미치지는 않았나 노파심에 너에게 메일을 써. 그 전부터 쓰고자하는 열망이 더해졌지만, 오늘이 그 축제의 날이네.
 


  '기억해야 함을 기억해라.' 이 말만을 기억하고 오늘까지 살았어. 흐린날도 맑은 날도 있지. 근데 항상 나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만 하다. 하루에도 수십번 무지개가 떠. 너는 알겠지 나의 마음속 심상들을. 

  긍정의 글이든, 혹은 부정의 글이든 내가 쓴 글이 너에게 힘이 됨을 느껴. 이건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이지. 결론과 어떤 목적 없이 보는 드라마 같달까? 마지막회를 기대하지 않고, 끝나지 않기를 손 모아 소망하는 그런거? 아니래도 상관없어 내가 그렇거든.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단. 이 생각은 내 스스로가 하는게 아니라, 어디선가 바람처럼 돌풍처럼 나에게 다가와. 그래서 생각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라 여겨지지만,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야. 생각이 날 찾아오는 거지. 뭘까? 니가 날 부르는걸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죽을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들이 몇가지 있지. 아니 셀수 없겠지?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것들까지 포함하니까.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나이 사십이 금방 될테고, 불편한 노인이 될꺼야. 그 생각에 나는 잠에 못들때도 있어.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평생을 살 것처럼 사는 내 친구들과 지인들, 그냥 사람들. 그런 미친 사람들 태반이야. 내 눈에는 저기 운석이 지구로 날아오는게 보이는데 그래서 우리가 다 죽을거란 확신이 드는데도, 아무일도 없어. 그게 날 미치게 만들어. 그러다가도 또 괜찮아지지. 일이란게 있으니까.

  그렇게 죽음을 내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 긴장도 되고 좋아. 그치만 슬픔을 떨쳐놓긴 어렵지. 왜냐고, 할게 너무 많잖아.

  오늘도 빗장을 걸어잠그고 내 안에 스며들어. 내가 만든 스스로의 감옥에 날 밀어넣어. 그렇게 고독하고 외롭고 춥고 그래. 근데도 그 안에서 계단을 오르는 나를 발견하면 또 저 밖으로 나가기는 싫어. 언젠가는 그 때가 오겠지. 이정도면 충분하다라고. 그러면 뭐 잠깐 나갔다 오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사색을 곱씹어도, 결론은 단 하나. 결국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이냐???

  그치만, 뭔가 있을꺼야. 그렇지?


  난 너의 친구야. 너와 나의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린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죽음이 오는 그 시대도 같을꺼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항상 생각해. 뭐가 되었든 나는 도움을 주고 싶다.라고.

  엄청난 걸 가진거 아냐?

2013년 9월 9일 월요일

블로그의 내 글을 읽으면서,,

 쓰기만하고 읽지는 않던 내 블로그.
  왠지 최근부터 아래로 차차 읽어보고 싶어서 읽다보니 눈물이 나려한다. 내가 쓴 글이지만 내가 쓰지 않은 것 같은 어색한 이 글들이 주는 느낌은 뭘까? 하지만 읽으면서도, 이런것도 추가되어야 하고 이런 내용도 언급해야 하는데 하면 뒤이어 여지없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시성. 분명 내가 쓴 글이 맞긴 하는 것 같아.
  내가 하고싶은 말들이 지금의 내가 읽어보니 도리어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이다.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나의 글들. 이 글들 자체에 문체에 마지막 마침표 하나까지 나에게 힘을 준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읽는 와중 이 글에 대해 평가하고 첨언하면서 조언한다. 그리고 뒤이어 부족함을 채워줄 그 문장이 나온다. 내가 이야기 하고 내가 듣는다. 극단적인 나와 나의 대화다.

  도서관에서 살고 싶다는 글을 읽으며, 미치도록 열망한다. 왜일까? 눈물이 흐를정도로 열망하는 이유는 뭘까?

보통 인간의 1,000년


  완벽한 깨닳음이란 없지만 어쩌면 많은 경험이란 것이 인생에 큰 의미를 차지하는듯 하다. 박진영의 노래 처럼 지금 그는 그 젊은 나이에 혹은 그 늦은 나이에 돈, 명예, 사랑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그걸 깨닳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 깨닳음을 일찍 겪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죽기 전에 겪을테지. 
똑같은 백년을 살아도 누군가는 보통사람의 천년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누군가는 뛰어난 이의 10년의 인생을 살겠지. 결국은 유한한 존재의 인간에서 얼마만큼 농축된 삶을 사는가가 중요한듯하다. 

  완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신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는 것. 그래서 내가 내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주변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의미있는 삶 아닐까?

  그래서 나는 보다 농축된 삶을 살고 싶다. 농축된 삶을 살다가 수 많은 경험이 주는 스스로가 만든 원칙에 갖히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여, 유희적인 삶을 살고 싶다. 어린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가지고, 찻잔의 그 모서리처럼 유머를 가지고 노는 어린 어른으로 살아다가 죽고 싶다.


  내 안에 이 천년이 있다.

2013년 9월 4일 수요일

혼자만의 시간, 혼자인 시간, 혼자있으려는 시간.

  혼자 있는 이 시간에 나는 과일을 먹었다. 냉장고에 늙을만큼 늙은 천도 복숭아를 꺼내서 칼로 잘라 먹는데, 그 신 천도복숭아가 너무나 달았다. 천도복숭아가 이렇게 맛있는거구나 하며 감탄을 해가며 먹었다. 그 순간 또 나는 혼자임을 실감하고 그 상황이 너무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고, 과일을 먹는데 유독 과일을 먹을때 혼자임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치만 슬프거나 외롭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그런 생각을 한다는 내 자신이 웃겼다.

  근래에 나는 여러개의 계단을 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혼자있으려는 이 시간에 책을 보고 사색에 잠기고 생각 의자에 그냥 앉아 있다. 이 작은 컨테이너의 효율적 배치를 위해 이렇게저렇게 바꿔보는 시간을 가지고, 점점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구조에 다다라감을 느낀다. 있는 것 그대로 활용해서 공간활용을 최대한 하고, 이 좁은 공간에 나름의 구역이 짜여져 있다는게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들 그냥 본다면 책상과 책이 눈에 보이겠지만 이 모든 배치의 동선이 나름의 의미가 있단것은 모를 것이다.
  생각 의자에서는 책을 보고, 업무 의자에서는 회사 업무를 본다. 앞의 쇼파와 의자 탁자는 손님용. 그래서 나는 거의 그 쇼파와 의자에 앉지를 않는다. 주로 나는 이 생각용 의자에 앉아 있다.

  생각 의자 옆에 기다란 스탠드를 옮기고 바짝 붙여 수납탁장을 놨다. 책을 읽다가 메모를 하고 싶을때, 혹은 노트북을 올려놓고 싶을 때 혹은 당장 읽을 책들을 올려놓는 용도다. 원래는 뭘 놓을 자리가 없으니 책들을 간이 책상처럼 쌓아놓으려 했지만 우수수 무너질 염려에 고민하던차, 이사할때 창고로 처박히려던걸 가지고 와서 활용한다. 

  이렇듯 내 삶은 개선이다. 점차점차 나은 환경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궁극적으로는 내 영혼을 가꾸고 아름답게 만드려는 의지의 포석이다.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작은 것 안에 더 작은 것들이 무수히 많이 들어있는 것처럼. 나의 이러한 작은 면들을 보면, 나의 큰 것에 대한 어떤 추구를 넌지시 알수 있을 것이다. 

  점차 나아지는 환경과 효율성에 대한 추구, 나의 성장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리라. 거울을 보고 나의 변화를 알아볼 수 없듯, 지금 당장에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주 예민하게 본다면 '느낄'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이 작은 공간에서 계단을 오름을 느끼듯, 아주 예민하게 관찰한다면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은 또 다시 나에게 피드백을 주고, 그 자체가 다시 나에게 힘을 준다. 이렇듯 선순환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