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0일 수요일

나주호

  미지근한 바람이 해풍처럼 불면 기분 좋은 시원함으로 느껴져. 호수가 펼쳐진 집에서 4일째 되는 날 느즈막한
오후 4시
의 바람.. 세상 모든 시간을 가진 듯한 느낌에 그 바람이 불면 눈을 감고 귀뒤로 흘러가는 바람을 한올 한올 느껴야지. 보이는 곳에 세워진 포르쉐는 항상 떠날 수 있는 정신의 반영이 되겠지. 그리고 석양색 대쉬보드는 돌아올 곳이 있다는 정신의 반영이 될 것이고,, 어둠이 찾아오면 친구들이 찾아온다. 일상 속에서 왁자지껄한 세상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고, 서로의 시간을 갖겠지. 그리고 ㄷ자 집의 한 가운데 정원에 모여 커피를 한잔 해야지. 
  여름의 향기가 이리도 좋다. 초록은 더 초록으로 보이고 향기는 그 향기가 더 깊어지지. 허리가 잘려나간 잔디의 잔인한 풀내음 조차도 생생하잖아.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책상에 머리 처박고 있기엔 삶이 너무 짧다. 순간순간 가만히 앉아 있는다. 아이폰의 빈약한 스피커든 보스 스피커든 차에서의 OEM 스피커든 갑자기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행위를 한다. 최대한대로 집중해서 악기 하나하나가 구분될수 있을 정도의 귀를 연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이 들고나서 주변을 돌아보면 다시 그 환경은 날 압도해 생생하게. 초록이 더 초록으로 보이고, 향기는 더 깊어진다. 공기를 갈라서 세세하게 느끼면 흐르는 공기와 냄새를 품은 공기, 돌아나가는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내 솜털을 켜켜이 넘어가는 공기도 있고, 텁텁하게 머무는 옷과 피부 사이의 공기도 있다. 느낄 수 있는 내가 정말 사랑스럽기도 하지. 

  기꺼이 자폐아처럼 세상을 느끼려 

2016년 7월 8일 금요일

살아 있다는 것이 고민이다_2016.7.8

  살아있다는 것이 고민이다. 삶이 풀려나가는게 묶인 실타래도 아닌데 언제까지 풀어야 하나. 삶은 일자 시소가 아니다. 시소들의 얽혀짐인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것 하나가 해결되거나 가라앉으면 어느것 하나가 발생하고 솟아오른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어떤 패턴이 있는 듯 하다. 우리가 집중하고 신경 쓸 수 있는 문제 자체는 거대한 한 가지에 압도되는 것은 아닐까? 다른 것에 대한 시선이 닫히고 현재 가장 마음 쓰이는 문제 혹은 생존을 위협하는 등의 위기 따위에 집중한다. 그래서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게 문제가 생긴다고 착각하는지도. 문제는 그냥 존재하는데 내가 달라진거지. 살만하면 별일이 생긴다. 생존의 위기 속에서는 별것도 아닐것들. 죽는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들, 고통이 없으니 고통을 찾아 떠나는 것인지도. 혹은 롤러코스터처럼 안전한 죽음을 경험하고 싶은 것인지도.
  아직은 살만하니까. 역사속에 검댕이 얼굴을 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수많은 위인들. 그들이 지금을 산다면 저마다 풍요속에서 빈곤을 살며 감정들을 소비하겠지. 그래서 무지가 행복인지도, 나는 무지보다 앎이 좋다. 그래서 후유증으로 고생하지만 어쩌겠나.



  이 살아있다는 것이 고민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삶은 고통이고 사랑은 아픔이다. 이 점들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온전히 배우고 느끼며 경험할 수 있다. 환희는 터널의 끝에서 빛나는 법이니. 초장부터 쫄지 마라. 

2016년 7월 6일 수요일

소년의 얼굴이 나에게 말을 했다_2016.7.6

  소년의 얼굴이 나에게 말을 했다.


  씻고 나와 티셔츠를 입으며 거울을 봤는데, 거울의 소년이 내게 말했다. 현재의 이 즐거운 시간에 대해 온전히 함께 하자고. 미소를 짓는다. 나를 사랑한다. 어떤 모습이 되던 간에 거울속 소년은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해줄테니까.

  어떠한 계기로 인해 잊고 있던걸 다시 또 되찾았다. 삶의 철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해야 함을 기억해라."이다. 이 말만을 믿고 여지껏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정보와 앎, 심지어 개인의 철학까지도 외부화가 가능하다.
  "어린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살다 죽겠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길가의 가로수, 돌맹이 하나까지도 누군가가 갖다놓았더라. 우리 사람이 관여된 모든 것들에는 인과관계가 깔려 있다.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자연은 논외로 치더라도...
  매력적인 사람들에 의해 내 마음의 빗장이 풀린다. 풀린 빗장으로 쏟아져나오는 것들은 형형색색으로 포장되어 있지. 그 포장을 뜯는 재미만으로도 몇일이 걸리겠지. 그 내용물은 또 어때. 그것들 하나하나를 가지고 노는 것만으로도 몇일이 걸리는데, 중요한건 그것들이 또다른 그것들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꼬리가 꼬리를 물고 죽음에 이르겠지만,,, 그렇기에 더 아름다운 거겠지.

  끝이 보인다는 것'', 내겐 죽음이 보인다. 진정한 끝은 죽음이지. 이것의 끝, 저것의 끝은 사실 표면에 달라붙은 먼지 같은 것. 그것의 본질은 죽음, 상실, 사라짐이다. 그러니 노인처럼 굴지 말자. 어차피 죽음은 닥달해도 오고 밀어도 온다. 
  요즘 수많은 심상들이 내게 찾아온다. 수많은 아이디어들이라고 고쳐써도 좋다. 머릿속 밀쳐내는 생각들에 입가에 미소와 흥얼거림으로 화답한다. 정말 신난다. 이런 창조적 파괴에 감사하다. 나를 무너트리고 뒤흔들었다. 그 균열 속에서 나는 죽음을 보고 전쟁을 겪는다. 싄난다.
  더 많은 매력적인 영혼들을 만나봐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왜 나는 잊고 있었나? 너무 삶을 사업적 궤도로만 바라보았나? 삶 자체가 사업이 되는게 맞는데, 사업이 삶에 되게하고선 선을 긋고 젠체했나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왜 깜빡했나? 더 좋은 어떤것,, 푸르른 영혼을 마주쳐보고 싶다.

  나를 던지는 나를 사랑한다. 허풍이 아닌 직선으로 걸어가 스스로에게 뒤를 돌아보지 않게 하고, 너무 먼 곳을 바라보지 않게 한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금 내 앞의 당신을 바라보며, 나를 던진다. 그게 나는 재밌고 유쾌하고 행복하다. 견딜수 없을정도의 간지러움이 내 몸을 타고돈다. 상처를 받는건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60억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횡령해도 견딜수 있는 회사를 만든다. 상처는 중요하지 않아. 그것을 견뎌낼수 있는 내가 중요한거지. 그러니 난도질당해 너덜해져도 괜찮아. 더 강해지니까.



2016년 7월 3일 일요일

2016.7.3. Am 3:03

#아름다운 인생이다. 오늘도. 탄탄한 피부와 사람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 자신의 삶에 감사하다. 찬란한 사랑이든 가슴아픈 사랑이든 삶이란 공간을 가득 채우는 현재라는 선물. 항상 내 귓싸대기를 후려치는 실감 앞에 또 환희의 눈물을 흘려.. 고맙고 고맙다. 살아있음에..

#니가 보고싶어서 자꾸만 생각나서 한참을 멈춰서서 서성거린다. 아닌걸 알면서도 계속 미련이 남고 붙잡고 싶어져서 자꾸 눈물이 나.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어. 내 전부가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까지 너의 그 미소가 간절해질거란걸 몰랐어. 너를 꼭 지켜내고 싶어.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어. 내 전부가 될줄 몰랐어. 이렇게까지 너의 목소리가 간절해질거란걸 몰랐어. 너를 꼭 지켜내고 싶어. 니가 보고싶어서 자꾸만 생각나서 붙잡고 싶어져서 서성거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질 건 없지만 난 같은 자리에서 늘 기다린다. 난 널 기다린다.

#시리도록 슬픈 감정도 밀려드는 환희도 모두 다 좋다. 이 비를 맞는 것이 좋다. 

#타고난 감수성을 탓해 무엇하랴. 그러니 그 나락들을 즐겨. 나는 온전히 나니까. 모든 것들은 흘러간다.

#진실은 늘 무기력해 모래처럼 부서지고 파도처럼 부서져버려.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하고싶은게 있다._2012.9.12

모든 이유가 있는 법. 변명을 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변명을 하지 말자.






여기, 하고싶은게 있다. 이 것을 안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럼 한다.


마음 속에 한마리 벌레가 살고 있는데, 그 벌레는 죽었다가도 살아났다가 또 죽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 무언가를 원하는데 그 것을 못하게 자꾸 막는다. 스스로의 합리화라는 독을 내 뿜으며 지금 당장의 심적 긴장완화라는 중독성 있는 독을 내 뿜는다. 결국엔 그 중독된 독에 나 스스로의 반란을 꾀하겠지.

쉽게 얘기해서 변명을 하면 끝이 없다. 변명을 하자면 어떠한 이유든지 찾아낼 수 있고, 나를 설득할 수 있다. 변명의 힘은 그런것이다.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이도 설득할 수 없는 나를 그 변명이란 놈은 쉽게도 설득할 수 있다. 챙피함, 무기력함, 연기, 부끄러움,,, 모든 감정들과 이유들을 동원해서 나를 설득한다. 그리고 나는 그 아래 무릎 꿇는다. 만일 내가 더이상은 이렇게 못살겠어라는 생각을 한다면,,, 적어도 그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 변명이란 놈 앞에 무릎 꿇고 질질 끌려다닌다. 

  문제는 타이밍인데, 언젠가 그 다짐을 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타이밍이 언제인지가 중요하다. 이건 마치 반드시 해야할 일을 저 멀리 놓아두고 잊을만하면 내 사고가 그 곳을 향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언제인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되도록이면 빨리 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쓸데 없는 소비를 막을 수 있다. 인간의 역사와 수명은 한정적이니까..

  가능한한 빨리, 되도록이면 그 즉시 하는게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월등히 낫다. 만약, 변명을 하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그 길로 가는 것이 습관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어서 고민의 시간마저 줄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습관으로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담백한 삶이 될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솔찍해지는 길인 이 습관은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나의 인생에 안겨줄 수 있을까?



2016년 6월 26일 일요일

나는 깨닫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닳았다._2015.12.20

 # 나는 깨닫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닳았다. 
#여기 내가 오늘 깨닳은게 있어. 매일 매일 그런 말을 하고 싶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만나면 오늘 재미난 일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나는 깨닫는게 가장 신난다. 나에게 가장 신나는 일은 깨닫는 것이다. 내일도 말하고 싶다. "오늘 깨닳은게 뭐냐면~"


  ##단순한 골프에서조차 깨닳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퍼져 나간다. 사업에 개인에 주변에 말이다. 유추를 통해 전혀 다른 분야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적용한다. 그리고 은유한다. 오늘 일의 그 너머의 깨닳음은 내가 깨닫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닳았다. 깨닳음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까지 지루함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멈춰서도 안되고 단순히 밀어붙혀서도 안된다. 적절한 정신의 탄력과 실행이 겸비되어야 하며 이론 또한 더해져야 한다.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때론 다른 사람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그 깨닳음을 얻는 것은 본인에 의해서만이 된다. 그래서 도움을 얻었다 해도 부끄러울 일이 아니고, 상대방이 우쭐해할 일도 아니다. 그 것을 온전히 깨닫는 것은 당사자 본인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지혜로운 이에게 의지한다면 그것은 깨닳음이 아니고 정보다. 정보는 깨닳음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깨닳음의 연속이다. 깨닫는다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좋아하다는 것과 결론을 같이 한다. 깨닳기 전의 나와 깨닳은 후의 나. 하나의 진리와 사실, 사물의 이치 등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 것을 몰랐었던 때의 내가 있다는 의미이고, 앎이라는 깨닳음을 얻었다면 그 후의 또 어떤 깨닳음이 있다는 말인데, 진실은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은 온전한 깨닳음을 얻을 수 없다. 세상의 패턴과 진리를 알수 있다손 치더라도 모든 것을 앎에 담을 수는 없다. 따라서 나의 무지를 확인하는 길이 나의 깨닳음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_2015.12.22

  오늘 드는 생각은 말이지.
  "보통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니?
우리는,, 여기에 무언가를 만들거나 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한다는 거고, 
보통 사람들은,, 그런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만이 할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한다는 거야.
그럼, 누가 현실적이고 누가 비현실적인건가?"

  이 질문을 빈 조수석의 친구에게 이야기 했다. 나는 비현실적인가? 아니면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건가? 

  열한시가 되었는데도 큰 호수의 양갈래 산에 걸쳐져 있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이 떠 있었다. 상상한다. 이른 아침에 자욱한 안개가 깔려 있고 해가 뜨며 서서히 걷히면서 굵직한 구름이 드러나는 그 모습을 나는 거대한 창밖으로 바라본다. 그 어떤 좋은 TV 보다 멋진 장관이리라. 차 한잔을 옆에두고 서서히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초단위로 지켜보고 싶다. 온전히 그 상황과 그 장소에 몰입해서 하나가 되고 싶다. 그 상상을 했다.



  나는 이렇듯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3억 짜리 사업 5개를 이룬다._2015.12.23

3억짜리 신사업 프로젝트를 5개 완성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사업으로 연계시키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무엇을 팔건 무엇을 서비스하건, 어


떤 사업을 인수 혹은 창업하건 간에 거기에 필요한 것을 해낼 수 있는 학습능력과 사람을 부릴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키우는 것이다. 한길을 걷고, 시시하게 하나의 사업으로 인생을 죽일 수 없지 않은가?

부둣가의 쇠사슬_2015.12.24

  사랑은 무엇인가?


가슴아프고, 상실을 전제에 두는 것인가? 나는 나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앞으로의 내게 어떤 축복과 반전의 사랑이 남아있을까? 부둣가의 그 녹슨 쇠사슬처럼 내 곁에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을 통틀어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대단한 사람이건 혹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그 사람을 나는 가질 수 있을까? 

멍청이_2016.1.11

사람이 멍청한건 정말 슬플 일이다.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 없이 동조하는 것은 참으로 멍청한 일인데도 그걸 모른다는 것은 안타깝다. 그보다 최악은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들에게 멍청하다 삿대질하는 것인데, 그 행위는 주변에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이 행성의 물



날아오르는 철새를 보며, 지나는 그 길 위에 보이는 호수를 보며 아 이 행성에는 물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뒷자석에서 보이는 평소엔 보지 못했던 것들과 보고싶었던 것들을 보며 오늘을 또 실감한다. 오늘 또 이만큼 왔구나. 

떠오르는 수많은 아이디어들_2016.2.7

 떠오르는 수많은 아이디어들,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길과 성취해야할 사명들이 나를 괴롭힌다. 나누고 싶은 그 원대한 이상과 영광이 한 가득 있는데 오늘은 또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삶은 분리고 또 결합이다. 그 것이 관계다. 
  나는 사방이 책상으로 이루어진 작업실을 가지고 싶다. 그 것은 곧 분단과 분절을 뜻한다. 협업과는 거리가 먼 작업장의 모습은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기계들로 둘러싸여 있고, 데이터들을 나는 가감 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가감없는 그 데이터는 여실이 현실을 반영하겠지. 
  데스크탑, 노트북, 타블렛 이 모든 것들이 도구로써 존재한다. 어떤 때는 데스크탑이 필요하고 어떤 때는 노트북이 필요하다. 내게 도구가 많이 필요한 이유는 하는 일의 경계가 불분명해서이리라. 그래서 그때그때에 맞는 도구들이 있어야 하나 보다. 
  하지만, 진정 원하는 것은 그 기계들에서의 독립이고 자유다. 모든것을 경우의 수에 따라 도구로써 소유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느것 하나도 도구로써 소유하지 않는 것이 일에 대한 나의 결론의 모습이다. 그것을 나는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또 필요하겠지. 뛰어나고 믿을만한 사람이. 그렇다면 그 결론의 모습에 다다랐을때 나에게 남는 것은 결정인듯하다. 결정하는 과정이 마지막 차원의 문제이고, 그 결정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고 뒤집어진다. 


  나는 블랙홀이다. 좋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그 보통의 좋은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내 주변에 펼치는 것. 그들의 삶에 원대한 영향을 끼치고 그들의 생각에 불을 지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그들을 하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 그것이 내 역할이다. 그래서 나는 결정한다. 뒤돌아볼 것도 없고 내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물을 사람도 없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으니 내가 온전히 책임을 질 수 밖에. 그렇기에 사업에 일어나는 모든 잘못들은 다 내 탓인 논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글 400개

  삶의 방식에 정해진 것이 없듯이, 사업의 성공에도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이 나를 항상 설레게 한다. 지금 하는 것이 영원히 할 것도 아니고, 지금의 삶이 계속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성공할 방식의 한계가 없으니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으며 갈 수 있다. 위대한 음악가의 음악을 들으며 이 방식으로 살아도 후하게 살 수 있음을 안다. 그게 뭐라고, 겨우 그거 가지고도 인생을 풍만하게 살 수 있는데, 나는 어떠한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다.


나는 하루에 글 하나를 쓰고자 마음 먹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철학 노트북에 글이 400개 가까이로 늘어났네

재능 역시 복리다.

재능 역시 복리다.



  복리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파르게 나타난다. 돈으로만 볼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재능이나 지혜를 봐야할 때이다. 진정한 복리의 힘은 많은 시간이 흘러야 나타난다. 세상 모든 것은 복리로 이야기 될수도 있는 듯 하다.

설계자의 의도_2016.2.14

설계자의 의도_2016.2.14
 

노동자는 경영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 경영자는 시장을 능가할 수 없다. 다만 편승할 뿐이다.
신은 우리를 설계했다. 대단한 사람이 될수 있는 가능성을 저마다 가지고 있는데, 평범한 이에 머무르려 할 뿐이다. 설계자의 의도를 알지 못한체 죽어가는 인구는 얼마나 많은가? 이 것 역시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간혹 대단한 사람이 나온다. 그 대단한 사람은 설계자의 의도대로 움직인 것이가?
  우리는 설계자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누구나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씨앗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은 바보이고, 설계자를 능가하려는 시도 자체는 모순이다. 결코 설계자를 이길 수 없고, 능가할 수 없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파악한체로 설계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신을 능가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할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 되라는 신의 의도를 파악하자. 물에서 벗어나는 물고기가 되려 하지 말고, 설계의 틀 안에서 이 시장이라는 기계 속에서 파악하고 편승하자.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한 깨닳음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고, 재무적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진창에서 벗어나자

  어딘가에 다녀왔다. 이 진창의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도 인맥이라고, 이런것 따위 뛰어넘었으면 한다. 진창 속에서 벗어나야지. 어차피 똑같은 사람 한 통속이지만, 이보다 조금은 우아하겠지. 

이 상태는 시스템이 될 수 없다_2016.4.1

  시스템은 그 자체로 진화해나가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고작 그 시스템을 개선하고 가꾸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그 시스템 자체가 될 수 없다. 시스템은 결국 우리를 잡아 먹을테고, 우리는 그 시스템에 종속된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곧 우리를 종속시킨다.
  할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한다. 그 다음의 것을 위해서 계속하는 힘을 통해 배움과 경험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바람이 불때를 기다렸다가 때가되면 우리는 바다로 나간다. 지금은 베이스켐프로 돌아오고 가고를 반복할 뿐이다. 우리의 베이스캠프는 한 곳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각각의 베이스캠프는 우리의 힘을 대신해준다. 우리는 나아간다. 그리고 정복한다.
  현재의 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며, 또 잘된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소유는 장애를 일으키며, 무소유의 빈손은 생각보다 강한 힘을 불러일으킨다. 가지지 못하기에 우리는 열등감 속에 살며, 그 열등감 때문에 우월감을 성취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완전한 우월감과 열등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쟁취하거나 잠시 소유하거나 할 뿐이다.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도 단 한가지도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위가 그저 우리가 있는 곳이고, 있어야할 곳이다. 어디를 가든 그 곳이 우리가 서 있는 곳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돈은 머리가 번다. 돈은 지식이 벌고, 지혜가 다수와 객체의 차이를 갈라논다. 그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굴곡이 깊어서 앞으로의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이 말의 뜻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반대로 생각보다 잘 될거라는 예상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상상하기 힘들고 우리가 우리의 분신인 회사를 생각하기 힘들다. 결국 회사는 우리의 역량만큼만 클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회사는 우리 역량의 총합이고, 미래의 우리 회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의 우리 역량의 총합이다. +,- *%의 편차는 있을 수 있지만, 평균은 우리 역량의 총합을 수렴한다. 

  그러하니, 인정하자. 현재의 우리 모습이 곧 우리의 역량이자 힘이고, 언젠가의 우리의 모습이 또 그 언젠가의 우리 역량이자 힘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이상과 그 이하는 잠시 머무는 행운이자 불행일 뿐이니, 우리는 우리를 개선해야 한다. 그 총합은 곧 회사의 개선이다. 인정하자. 지금 우리가 잠시 찌질한 것 뿐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_2016.4.1

지금의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
머릿속이 복잡한 만큼, 삶이 복잡해진다. 혹은 삶이 복잡한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사실은 머릿속의 복잡함은 결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일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플하게 살기 위해서 나는 도구를 사용하고, 그 도구들을 목적에 맞게 분리한다. 앱 역시도 도구에 맞게 분리한다. 역설적이게도 어느정도 분리의 영역이 가속화되면 어느 시점에 분리가 오히려 심플함을 헤친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는 분리가 해가 되기도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분리는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안겨주었는가? 앱의 분리들은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안겨줬는가?
내가 글을 쓰고 철학을 할 때 사용하는 아이패드는 그 뜻대로 사용하는가? 결국 나누어놓은 그 역할에 맞게 사용하지 않아서 머릿속만 복잡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텍스트를 믿자고 한 내자신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나의 하인이 되어야 하는데, 생각이 너무 복잡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속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폐해일 수도 있단 생각이 지금 든다. 방금 깨닳았다.

  궁극적으로는 도구나 앱과 마찬가지로 나도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설계자가 나를 설계한대로 내 삶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방향성에 나를 올려 놔야 한다. 나는 나의 주인이자 나의 하인이다. 나는 나를 조종하는 조종사이자 서커스의 곰이다. 

글은 생각을 만들고, 내 생각은 글이 흘러가듯 사고한다. _2015.4.2

글은 생각을 만들고, 내 생각은 글이 흘러가듯 사고한다. 따라서, 나는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쓸때처럼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을 가지고 계속 흘러간다. 글을 쓰기 위해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글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사고 또한 체계적이고 쌓아올리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잘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업적과 효과를 아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지혜가 아닌 타인들의 지혜의 총 합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봐야 나를 알수도 있는 법.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하자. 계속 실수하고 배우고 또 실수한다. 그렇게 타인과의 차이점을 통해 나를 알고, 제대로된 길 위에서 제대로된 방법으로 나를 가꾸고 개선한다. 

  오늘 깨닳은바는 나는 글을 많이 써야 한다. 무언가를 끄적이고 남기고, 내 두뇌의 모호한 생각들을 문장으로 완성할 때 비로소 그 것은 내게 힘이된다. 내가 쓴 것이 나에게 힘을 주는 모순, 나는 나의 텍스트를 믿어야 한다. 쓰지 않을때, 나는 멈춰있는 것이고 고여있는 물이 된다.


#환경
항상 무언가를 바로 쓸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떠오르는 것은 무조건 메모한다. 그 메모가 나중에 다시보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쓰는 순간 나는 심상과 상상, 생각의 모호함을 문장으로 표현해야만 하니까. 그렇게 그 것은 다시 내 마음에 남는다.
  항상 수첩과 아이폰을 손에 쥐고 있는다. 아이패드로 글을 쓴다. 할일관리는 이것과는 별개다.
수첩과 짤막한 글들을 긴 글로 완성한다. 이 행위를 반복한다. 언제건 쓴다. 어디서건 쓴다. 



#나는 기록하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다.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고 습관의 기계다.

4/30 AM 2:46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고 습관의 기계다. 육체를 갖고 있는 한 이를 떨쳐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가까운것에 정신이 가고 어제까지 살았던데로 오늘을 살아간다. 그렇게 죽음에 한 없이 가까워진다. 이러한 진실을 나는 오늘도 대면하며 무너진다.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 나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삶은 그저 느림보 대형 선박처럼 느껴진다.
  새벽이 깊어갈수록 아침에 다가서고 책상에 머리 박고 있으니 이내 저녁이 되고 한끼 식사가 다시 밤을 부른다. 잠시 눈 감았다 뜨면 지금 같은 깊은 새벽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어두울 때 여명은 찾아온다. 우리 짧은 삶에서 글을 쓰다 불현듯 하나의 문장이 또 떠오른다. "좋은 사람들과만 사업하기에도 이 삶은 짧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고, 만나고 있는가? 
  속고 속이고 정신 없는 와중에 어디에 내 사람이 있나? 어디에 변하지 않을 내 사랑이 있나? 먹먹한 현재의 순간에도 나는 정신을 차렸다 잃었다를 반복한다. 될 것 같다가도 의기소침해 진다. 그러나 나는 기계처럼 된다고만 떠든다. 이 거대한 배가 침몰할 것 같은 기분인데도 나는 될거라 말한다. 그러다가 상황이 별 것 아님을 인지하고선 혼자 콧노래를 부른다. 그래, 이 따위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겨우 돈 몇푼일 뿐이야.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이 돈이다. 인스타그램의 포르쉐를 보며 한켠 의아해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많은 돈이 이 바닥에 흐르고 있는가 자문하면 세상일 별거 아니게 느껴진다.
  나 한사람은 비현실적이어야 해. 모두가 미쳐 날뛸때 홀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눈을 감고 바다 너머의 폭풍을 봐야만 한다. 가지되 갖지 아니하고, 하되 하지 않아야 한다. 각각의 마음속 보석을 찾아서 꺼내줘야 한다. 오로지 그것이 나의 숙. 나는 잘하는게 없는 사람이고 가진게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저 통과하는 거대한 통로가 되어서 무엇이든 지나가게 해야 한다.
  나의 정신과 의지력은 너무나 유약하기에 나는 또 욕망과 습관에 기댄다. 애증처럼 정말 진절머리나게 싫다가도 나는 문을 두드린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나의 욕망에 기인하고 그 거ㅗㅅ을 실현하는 과정은 습관에서 비롯된다. 나는 나의 충실한 주인이자 하인이다. 그 둘은 동시에 것이다. 그러하니 나는 오늘도 인정한다. 오늘도 다시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 아직도 내가 용수철인가 보다. 하지만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가장 큰 것은 지금의 내가 '일'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별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삶의 명분 정도는 갖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빛을 품을 수 있고 새어나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내 회사가 모든 전리품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린 그저 세상의 한 가지 나사가 되길 바라니,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 작은 것에서 그 단위의 작은 성공을 통해 이 명분을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쯤 평생을 걸쳐 딱 하나쯤은 쉬이 이뤄낼수 있지 않겠나? 30년 정도면 원하는 인생을 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또 마음을 다잡고 힘을 뺀다. 겨우 시작인 이 순간에 기력을 소진할 필요는 없다. 겨우 세 발짝 왔을 뿐이야. 출발선상에서 우린 서있을 뿐이다.


  인생에서 하나쯤, 한 가지쯤은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을 우리 먼지 같은 저마다는 다 갖고 있다. 용기를 내라. 죽음이 바로 곁에 있으니까.